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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불 막은 택배기사, 문 두드리며 "대피하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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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지난해 10월 25일 오후 1시 서울 강서구 마곡동의 한 아파트 단지. 

인기척이 뜸한 점심 시간 직후 CJ대한통운 마곡지구 택배집배점 김선학(52) 사장은 물품 배송을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16층 아파트인데 이날 배달할 곳은 6층과 8층. 그런데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냄새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계속 타고 올라갔더니 14층에서 연기가 났다. 벽 한 쪽에 쌓아둔 적치물 사이에서 화재가 일어난 것이다.

김선학 CJ대한통운 마곡지구 택배집배점 사장이 지난해 10월 화재 진압하던 상황을 재연하고 있다. [사진 CJ대한통운]

김선학 CJ대한통운 마곡지구 택배집배점 사장이 지난해 10월 화재 진압하던 상황을 재연하고 있다. [사진 CJ대한통운]

 그는 주민 대피가 우선이라 생각했다. “불이 났어요”라고 소리치며 문을 두드렸다. 

 한 집에서 나이 든 여성 주민이 잠시 문을 열었지만 겁을 먹었는지 바로 문을 닫았다. “더 이상 주민 대피가 힘들 것 같아 소화기를 찾았는데 14층에 없었답니다. 연기 때문에 입을 막고 아래층에 내려가서 소화기를 들고 올라왔죠.”  김 사장은 우선 소화기를 흔들고 안전핀을 뽑고 화재가 난 적재물 쪽으로 사정없이 쏴 댔다. 정신없이 불을 끄다 보니 그의 얼굴과 몸은 온통 분말 가루 범벅이 됐다. 3.3㎏ 짜리 소화기를 다 쓰고 나니 불이 완전히 꺼졌다. 잔 불로 인한 재발화 가능성 때문에 그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렸다.
 관리소 관계자는 “김 사장의 말은 듣곤 처음엔 작은 화재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현장에 올라보니 한 벽면을 다 태우고 위에까지 화염이 올라간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불을 못 꺼 15~16층까지 올라갔다면 큰 일 날 뻔 했습니다”라고 전했다.

김선학 CJ대한통운 마곡지구 택배집배점 사장이 지난해 10월 화재 진압 공로로 아파트 입주자대표회로부터 감사패를 받고 있다. [사진 김선학]

김선학 CJ대한통운 마곡지구 택배집배점 사장이 지난해 10월 화재 진압 공로로 아파트 입주자대표회로부터 감사패를 받고 있다. [사진 김선학]

 아파트 주민 사이 입소문으로 택배 기사 덕분에 대형 화재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소식이 퍼졌다. 입주자대표회는 지난해 11월 21일 김 사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김 사장은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지만 이러한 소식이 회사에 알려진 것은 동료가 해당 단지를 지나다 아파트 관리소의 공고문을 보면서다.

 ‘마침 배달 업무 중인 CJ택배 기사분이 발견 조기 진화해 대형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다’  

김선학 CJ대한통운 마곡지구 택배집배점 사장이 작업장인 인천 서운동의 강서B 서브터미널에서 감사패를 들고 있다. [사진 CJ대한통운]

김선학 CJ대한통운 마곡지구 택배집배점 사장이 작업장인 인천 서운동의 강서B 서브터미널에서 감사패를 들고 있다. [사진 CJ대한통운]

 동료는 회사에 이런 사실을 알렸다. 회사도 무척이나 반겼다. CJ대한통운은 지난해 7월 국민안전처(현 행정안전부ㆍ소방청)와 함께 소속 택배집배점 사장과 택배기사를 대상으로 안전교육을 했던 상황이다. 당시 전국 39개 소방서에서 화재와 안전사고 발생시 대응 요령을 배웠다. 앞서 2016년에는 경찰청과 ‘민관 협업적 치안활동을 위한 업무협약’도 했다.

 김 사장은 화재 진압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 보니 지난해 12월 제천, 지난달 26일 밀양에서 잇따라 대형 화재가 일어난 것을 보곤 마음이 아팠다. 

 지난달 31일 인천 서운동 작업장(CJ대한통운 강서B 서브터미널)에서 만난 김 사장은 “화재 진압은 초기 1분 1초가 중요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배달 구역을 구석구석 잘 아는 택배집배점 사장이나 택배기사 누구나 의용 소방대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선학 CJ대한통운 마곡지구 택배집배점 사장이 작업장인 인천 서운동의 강서B 서브터미널에서 부인과 함께 택배 분류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 CJ대한통운]

김선학 CJ대한통운 마곡지구 택배집배점 사장이 작업장인 인천 서운동의 강서B 서브터미널에서 부인과 함께 택배 분류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 CJ대한통운]

 그는 택배 자체는 고된 일이지만 부인과 함께 일하면 월 1000만원을 벌 수 있는 꽤 쏠쏠한 돈벌이라고 전했다. 최근 안정된 소득뿐만 아니라 보람도 얻고 있다. 김 사장은 아파트에 배달한 뒤 차에 돌아오면 깜짝 놀라는 경우가 많다.

 주민들이 화재 진압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음료수뿐만 아니라 간식으로 핫도그ㆍ부침개를 차량에 넣어주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챙겨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단지에 나이 드신 분이 많이 계신데 위급 상황에 대비해 심폐소생술도 배웠답니다. 택배뿐만 아니라 주민의 귀중한 생명을 구하는 안전 지킴이로 저를 활용해주세요.”
 인천=강병철 기자 bong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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