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헤맨 새만금 … 리더십이 문제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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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최종판결이 내려지기까지 숱한 소모와 갈등이 있었다. 1991년 착수했으나 이제껏 간척지의 용도조차 확정 짓지 못하고 있다. 두 차례에 걸쳐 2년간이나 공사가 완전 중단됐다. 법원 간 결정 내용도 달랐다. 한쪽에서 환경 파괴를 막아야 한다는 삼보일배( 三步一拜)가 있는가 하면 다른 쪽에선 이미 들어간 2조원을 허망하게 날릴 수 없다는 삭발의식이 열렸다.

반대와 충돌, 변경과 중단이 거듭됐다. 공사기간은 하염없이 늘어났다. 예산도 천문학적으로 증가했다. 국민끼리 불신은 깊어만 갔다. 새만금 20년 우여곡절의 뿌리는 '참을 수 없는 리더십의 가벼움'이었다. 국가전략 사업의 작성에 선거의 정치성이 스며들었다.

새만금 사업은 87년 12월 10일 전주 코어호텔에서 있었던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의 공약발표에서 출발했다. 호남의 성난 민심이 유세 중인 노 후보에게 돌팔매질을 했다. 노 후보는 연설을 중단한 뒤 호텔로 황급히 돌아와 "전북도민의 염원인 새만금 축조 사업을 임기 내에 완공해 호남 발전의 신기원을 이룩하겠다"고 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식량 안보'를 위한 대규모 농지 확보 차원에서 검토됐다가 경제성 문제로 서랍 속에 들어갔던 새만금 계획서가 다시 세상에 나온 경위가 이랬다.

야당의 김대중 총재는 정치생명을 건 예산 따내기 투쟁을 벌였다. 그게 90년이었고, 노 대통령과 담판을 통해 91년 추경예산으로 설계비 200억원을 처음 반영했다. 새만금은 그 뒤로 호남의 지도자 김대중의 대표 업적이었고, 대통령 김영삼이 호남 민심을 달래기 위해 군말 없이 예산을 배려한 사업이었다.

노무현 대통령도 해양부 장관 때는 "대규모 갯벌이 없어질 새만금 사업에 무조건 동의할 수는 없다"고 했다가 대선후보 시절엔 "제가 대통령이 되면 확실히 밀겠다"고 했다.

새만금 공사가 중단된 건 역설적이게도 김대중 정권에서였다. 민주화의 결과로 덩치가 커진 시민세력들이 환경문제를 제기했다. 시민세력의 힘으로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또 '식량 안보'가 국가목표였던 80년대에 작성된 새만금 사업은 2000년 전후 '갯벌 환경'이 화두가 된 시대엔 다른 시각의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새만금의 갈등은 '정치'에서 시작해 '사회'세력들을 휘젓고 결국 '사법'의 영역에서 최종 조정됐다. '새만금 리포트'의 저자 문경민씨는 "환경의 고려와 여론의 동의 없이는 국책 사업을 진행할 수 없다는 귀한 교훈을 지난 세월 얻었다"고 말했다. 지도자들이 국책사업을 세울 때 최소한 10년 뒤의 시대 변화와 수요를 읽어야 한다는 지적도 했다. 욕을 먹더라도 표의 정치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새 국토의 용도를 사회적으로 합의하는 일만 남았다. 간척지는 역시 중국시장을 겨냥하고 세계의 자본을 유치할 친환경적 비즈니스 모델을 따라야 할 것이라고 많은 전문가가 강조하고 있다.

두바이는 우리의 새만금이 착공된 91년만 해도 불모의 사막이었다. 이 왕국의 셰이크 모하마드 국왕이 95년 왕세자로 지명된 뒤 두바이는 '150여 개국 비즈니스맨들이 몰리는 코스모폴리탄 도시국가'로 급속히 변모했다. 모하마드는 세계적인 도시 개발사업가이기도 하다. 새만금이 지금 '땅의 가치'를 높여 줄 현명한 리더십을 기다리고 있다.

전영기 정치부문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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