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세 총리 나가면 분권형 국정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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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14일 아프리카 순방을 마치고 서울공항으로 귀국해 공항 청사를 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이해찬 국무총리가 물러나게 됨에 따라 이 총리를 축으로 움직였던 '분권형 국정 운영'도 기로에 서게 됐다.

총리실 관계자는 "노무현 대통령이 내치(內治)의 대부분을 이 총리에게 맡겨 총리실은 국정 운영의 중심이었다"며 "실질적인 국정 공백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 총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 총리였다면 과연 '분권'이 가능했을지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 혼란에 빠질 국정 현안 수두룩='실세 총리의 힘'을 바탕으로 총리실이 이끌어가던 적잖은 국정 현안이 표류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 문제가 난관에 빠지게 됐다. 검찰과 경찰은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이후 지금까지 3년간을 싸웠다. 노 대통령은 지난해 말 이 건을 총리실로 넘겼다. 검경은 자신들의 최종안을 제출했고, 총리실은 이달 중 최종 결론을 낼 계획이었다. 하지만 검찰과 경찰 총수가 잇따라 바뀌고 오영교 행정자치부 장관까지 지방자치단체장에 출마하려고 물러나면서 결론 도출이 지연됐었다. 총리실 관계자는 "검경 수사권과 관련된 논의가 완전히 중단된 상태"라며 "올해 안에 해결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저출산 고령화 대책 연석회의도 총리실이 강력히 밀어붙이던 사안이었다. 재계.노동계.여성계.시민단체.학계.정부 등 각계의 대표성 있는 단체를 끌어모아 범사회적 해결책을 모색하겠다는 게 총리실의 목표였다. 노동부가 주관하는 노사정위원회에는 불참했던 민주노총도 총리실의 연석회의엔 참석하기로 했다. 총리실의 또 다른 관계자는 "실세 총리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총리실은 이번 연석회의를 토대로 '국민 대통합 연석회의'를 만들어 모든 사회적 갈등을 다루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 총리가 물러남에 따라 연석회의의 장래는 불투명하게 됐다.

'평화적 집회와 시위문화 정착을 위한 민관 공동위원회'는 경찰과 시민단체 사이에 의견이 갈리는 사항을 5월 회의에서 처리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경찰 관계자는 "이 총리가 물러나고 난 뒤에도 총리실이 경찰과 시민단체의 이견을 조정하는 강력한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제 막 논의가 시작된 방송.통신 융합 단일기구 설치 문제는 부처 간 이견이 워낙 첨예해 총리실의 리더십이 없을 경우 합의가 어려운 형편이다. 또 16일로 예정됐던 '일자리 만들기 대책을 위한 당.정.청 특위' 3차 회의가 취소되는 등 이 총리의 사퇴로 인한 공백이 적지 않은 상황이다.

◆ 분권이었나, 독주였나='분권형 총리제'에 대해선 평가가 엇갈린다. "헌법정신에 따라 대통령과 총리가 권력을 분점하는 모델을 보여줬다"는 찬성도 있고, "총리실이 일반 부처가 해야 할 일까지 일일이 간섭하는 등 사실상 독주였다"는 비판도 있다.

방사성폐기물처리장 부지 선정의 경우 이 총리가 취임 직후부터 직접 챙겼다. 총리실이 밀어붙여 '중.저준위용과 고준위용 분리' '희망 지자체 간 경쟁 구도 형성'등의 아이디어가 나왔고, 경주에 유치되는 성과가 있었다.

8.31 부동산 대책도 이 총리가 주도했다. 매주 한 차례 당정 협의를 이끌며 부처 간 이해가 엇갈리던 사안을 조정했다. 하지만 이 대책은 경제논리보다 정치적 목표가 앞서는 바람에 결국은 집값을 잡는 게 아니라 집값만 올려놨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국무조정실 관계자는 "분권형 총리제의 기틀이 막 만들어져 가는 상황이고 아직은 이 총리의 개인적 리더십에 의지하는 부분이 컸던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최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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