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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졌지만 꽃병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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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가 있다면 제이슨 밀러는 그 경계에 아슬아슬 걸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만들고 그 물건들을 판다. 그런데 그가 만든 물건들은 어떤 껄끄러운 인상을 준다. 예로 그의 꽃병 '아름답게 깨진'(꽃병에 붙인 이름이다)을 들어보자. 이 꽃병은 단순한 원통형의 유리병으로 그 안에 꽃을 가득 꽂을 수 있는 효용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꽃병은 깨져 있다. 정확히 말하면 깨졌다가 다시 붙여졌다. 즉 꽃병은 디자이너의 의도로 조심스럽게 한 번 깨진 다음, 더욱 조심스러운 방법으로 그 깨진 자리가 복구돼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복구된 자리에는 색이 들어가 있다. 어떤 것은 푸른색이, 어떤 것은 붉은색이, 또 어떤 것은 검은색이 절묘하게 스며들어 있다. 마치 어떤 불가사의한 기운이 깨진 자리를 붙여 놓은 듯하다.

꽃향기를 남길지는 모르겠지만 꽃병은 한 번 깨지면 그만이다. 내다 버려야 한다. 그게 꽃병의 속성이다. 그러니까 한 번 깨지고도 꽃병일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엄청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깨졌지만 꽃병이다"라는 자기 존재에 반하는 속성으로 자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껄끄러운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자신의 연약함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면서 일종의 갱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아름다운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 꽃병은 신기하게도 꽃을 꽂아 놓으면 별로 예쁘지가 않다. 꽃을 꽂도록 태어났지만 꽃을 꽂으면 그 원래의 기운을 잃는 것이다. 제 존재로서의 주장이 하도 강해 세상에서 요구하는 효용을 더하면 그 존재감이 사라지는 것 같다. 제이슨 밀러의 작품들은 이런 식으로, 소용되기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 소용을 거부하는 속성을 가진다.

사람도 저마다 효용성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다. 하지만 동시에 제이슨 밀러의 꽃병처럼 연약하면서도 강력한 주장들 또한 갖고 있다. 물론 회사원으로서, 주부로서, 학자로서, 편집장으로서, 학생으로서, 군인으로서, 정치인으로서, 연예인으로서, 기자로서 모두 맡은바 기능을 다해 돈도 벌고 성공도 해야 잘사는 것이겠지만 그 와중에 잃어버릴지 모르는 자기만의 애틋한 주장도 보살필 일이다. 나에게 주어진 '꽃'들을 담아내느라 내가 어떻게 생겨 먹은 '꽃병'인지 혹 잊은 건 아닌지. 깨졌다면 어떤 식으로 깨졌고, 멀쩡하다면 어떻게 멀쩡한지 모르는 건 아닌지. 그러려면 언젠가 담아 놓았던 '꽃'들을 모두 뽑아 버리고 단출하게 그냥 '있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어느 주말 오후쯤 말이다. 물론 월스트리트 저널의 기자 애슐리에게 이런 말까지 다 하진 못했지만, 전화를 끊고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토요일 오후를 보냈다.

박상미 화가·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