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일의 인사이드 피치 237. 이 감동, 전설이 되려면…사료 축적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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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도쿄돔에서 열렸던 한.일전 입장권을 어렵게 구했다. 다 지난 경기의 입장권을 무엇하러? 추억의 소중함, 감동의 따스함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서였다. 안면이 있는 한 일본 기자에게 부탁해 그 입장권을 받아들고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쓰다듬을 때마다 아라비안나이트의 요술램프처럼 이승엽의 역전홈런 감동이 되살아났다. 박찬호의 멋진 마무리, 고개 숙이고 돌아서던 이치로가 떠올랐다. 그 입장권을 볼 때마다 다시 그 감동에 취할 수 있을 것 같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에서 한국 대표팀이 연일 극적인 승부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기는 것도 이기는 거지만 그 과정과 순간이 한편의 드라마다. 때로는 패기와 힘으로, 때로는 경험과 노련미로 상대와 겨루고 앞서나가는 장면들이 한편의 영화 같다. 손에 땀을 쥐는 접전의 순간을 지나 찬란한 승리의 무대에 우뚝 선 우리 선수들은 감동의 메신저다. 국민은 그들로부터 '명품 야구'라는 선물을 받았다. 스포츠의 진수를 느끼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을 취재하면서 '다시 보고 싶을 땐 어떡하나'라는 조바심이 생긴다. 영화만큼 재미있는, 드라마처럼 감동적인 승부를 연출해 내고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감동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릴까봐 생기는 조바심이다. 언뜻 이 모든 과정과 승부를 한편의 다큐멘터리로 만들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처음부터 왜 그 준비를 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이번 대회를 위해 착실한 준비를 했다. 전력분석요원을 라운드별로 투입하며 상대 분석에 치밀했고, 선수들이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하는 데 최선을 기울였다. 그 결과 우리 선수들은 경기력에서 최상의 수확을 올리고 있다. 더 이상 일본.미국을 '저 먼 나라의 야구 선진국'이라고 보지 않아도 되는 기량을 펼쳐보였고, 전 세계 야구인들로부터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모든 준비와 노력이 경기와 승리 위주에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감동적인 승부도 좋지만 선동열과 박찬호, 이종범과 이승엽이 한자리에 모이는 그런 자리를 팬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소중한 기회가 승부에만 덮여서 지나가고 있는 건 아닌가.

메이저리그 구단에는 '아키비스트(Archivist)'라는 자료 전문가들이 있다. 구단의 역사와 전통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베이브 루스의 방망이가, 루 게릭의 유니폼이 전설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다. 미 프로풋볼리그(NFL)는 자체적으로 'NFL 네트워크'를 운영, 각종 이벤트와 경기를 사료(史料)로 남긴다.

이제 한국 야구도 외부 미디어에 의존할 게 아니라 사료전문가와 'KBO 네트워크'를 생각하고 준비해볼 때다.

애너하임=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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