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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보장 프랑스병 방치 땐 주변국에 추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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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프랑스 상아탑의 대명사' 소르본 대학(파리 제4대학)은 파리를 안내하는 관광책자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정작 관광객들은 들어가지 못한다. 학생들의 공부에 방해가 될까 봐 경비원들이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기 때문이다. 750년 역사를 간직한 프랑스 지성의 전당에 걸맞은 대접이다.

그런 소르본 대학에 11일 새벽(현지시간) 경찰이 투입됐다. 강의실을 점거하고 8일부터 농성을 벌이던 학생들을 강제해산시키기 위해서였다. 1968년 학생혁명 이후 대학에서 이렇게 며칠간 농성이 벌어진 것은 드문 일이다. 프랑스 정부는 사태가 더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할 수 없이 강제해산에 나섰다고 밝혔다. 하지만 68년 학생혁명의 중심무대였던 이 대학에 경찰력이 투입된 것은 이례적이다.

그동안 대학을 포함한 프랑스의 문화가 바뀌었다는 말이다. TV 카메라가 잡은 경찰의 강제해산 장면은 80년대 한국의 군사정권이 하던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경찰은 최루탄까지 동원했고 학생들은 이에 맞서 집기와 책을 던지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무엇이 고고하던 프랑스의 대학문화를 이렇게 끌어내렸을까. 그건 고용에 관한 문제였다. 이번 농성사태는 9일 의회를 통과한 기회균등법안에 포함된 최초고용계약(CPE)이 원인이었다. CPE는 고용주가 26세 미만 사원을 채용한 뒤 처음 2년 동안은 특별한 사유가 없어도 해고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프랑스 정부가 23%에 달하는 높은 청년실업률을 낮추려고 마련한 고육지책이다. 한번 채용하면 해고가 어려운, 경직된 노동환경을 바꿔 기업들의 신규 채용을 권장하자는 취지에서다.

그러나 노동계와 대학생들은 CPE가 근로자들의 고용불안을 가중시킬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해부터 실업해소를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정했다. 일자리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특히 심각한 청년실업은 각종 사회문제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문제는 정부가 내놓은 실업해소책이 변화를 싫어하는 프랑스인들의 정서와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안정을 선호하는 프랑스인들은 직장도 한 번 들어가면 당연히 정년이 보장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프랑스 정부는 이런 안일한 생각에 "안 돼"라고 분명하게 답하고 있다. 그동안 주변국에 속절없이 추월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린 결론이다. 지극히 프랑스적인 병을 뿌리 뽑기 위해 인기하락을 각오하고 메스를 든 정부의 퍼런 서슬 앞에 상아탑이라고 해서 성역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파리=박경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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