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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암호화폐와 그 적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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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암호화폐 하면 비트코인 같은 대표선수를 먼저 떠올리겠지만 이름부터 기발한 암호화폐가 많다. 푸틴코인, UFO코인도 있고 심지어 섹스코인도 있다. 인터넷에서 유행한 일본 개 시바이누를 마스코트로 삼아 비트코인의 패러디로 시작한 도지코인은 15일 현재 시가총액 13억 달러(약 1조3800억원)로 업계 순위 36위에 올라 있다. 놀이처럼 시작했고 온라인을 제외하곤 딱히 쓸 데도 없는데 말이다. 암호화폐 거래소 코인마켓캡에 있는 1400여 개의 암호화폐 중에 시가총액 10억 달러를 웃도는 건 도지코인을 비롯해 40개뿐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최근호는 도지코인의 시가총액이야말로 ‘미친 암호화폐 시장’의 시그널이라고 지적했다.

아예 투기와 광기를 희화화한 것 같은 작명도 있다. 이름부터 제정신이 아닌 인세인코인(InsaneCoin)은 시가총액이 600만 달러다. 로또코인과 카지노라는 이름도 있다. 심지어 폰지코인(PonziCoin)이라는 ‘솔직한(?)’ 작명도 보인다. 폰지는 폭탄을 돌리다 결국 마지막 차례에서 터지는 피라미드식 금융 사기를 가리킨다. 암호화폐를 ‘바다이야기’ 같은 도박에 빗댄 유시민 작가는 아마 공감할 것이다. 비트코인의 개발자로 알려진 ‘사토시 나카모토’에서 따온 사토시매드니스도 있다. 불교의 업(業)을 뜻하는 카르마(Karma)도 나왔다. 돈을 벌든 잃든 모두 다 당신의 업보(業報)라는 뜻일까.

암호화폐 규제를 반대하는 청와대 국민청원 참여자가 어제 19만 명을 넘어섰다. 청원 내용으로 볼 때 이들도 거래실명제와 과세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더 이상의 정부 규제는 원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도 정부 규제만을 암호화폐의 적으로 보는 시각은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비트코인의 시가총액 비중은 암호화폐 전체의 3분의 1로 줄었다. 그 빈자리는 거래 합의 프로세스를 소프트웨어에 내장한 스마트 계약이 장점인 이더리움, 국가 간 송금이 편한 리플, 개인정보 보호에 강한 모네로와 Z캐시, 자선단체에 송금하기 좋은 스텔라 등의 신생 암호화폐가 차지했다. 매일 암호화폐 하나씩이 생긴다고 하니 또 어떤 강자가 득세할지 모를 일이다.

1억8000만 명의 사용자를 거느린 텔레그램이 시장에 뛰어들고 페이스북도 사업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페이스북이 실제 시장에 진입한다면 비트코인 전성시대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철학자 카를 포퍼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전체주의를 열린 사회의 적이라고 썼지만 암호화폐의 적은 암호화폐 안에 내재돼 있다.

서경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