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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슬레 세봄'이 폭발시킨 이란 시위…사망 20명으로 늘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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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현지시간) 이란 수도 테헤란대학교에서 경찰이 반정부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교문을 봉쇄하자 학생들이 항의하고 있다. 이들은 휴대폰으로 시위 현장을 중계했다.[AP=연합뉴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이란 수도 테헤란대학교에서 경찰이 반정부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교문을 봉쇄하자 학생들이 항의하고 있다. 이들은 휴대폰으로 시위 현장을 중계했다.[AP=연합뉴스]

 이란 반정부 시위가 해를 넘기면서 전국에서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다. 현지 언론에서 2일까지 보도된 사망자 수가 최소 20명에 이른다. 1일 밤(현지시간) 중부 이스파한 주에서만 9명이 숨졌다. 이란 국영 방송은 “일부 시위대가 총을 탈취하려고 경찰서를 공격하려다 충돌이 발생해 6명이 사망했다”고 전했다. 시위대가 쏜 사냥총에 맞아 경찰관 1명이 숨졌다는 보도도 이어졌다. 2일까지 수도 테헤란에서 체포된 시위대 숫자만 450명 이상으로 늘었다.

민생고 불만 시위 닷새째 확산, 1일에만 9명 숨져 #최고성직자 하메네이 비판 등 신정 체제에도 저항 #인구 절반 넘는 35세 이하 '제3세대'가 시위 주축 #스마트폰으로 영상 촬영 SNS로 전 세계와 공유 #트럼프 "이란, 음식과 자유에 굶주려" 트윗 #미, 기존 핵 합의 뒤엎고 추가 제재 검토도

시위는 지난달 28일 동북부 마슈하드에서 시작됐지만 테헤란은 물론 지방 각 중소도시에서 수천명이 참여하는 식으로 확대되고 있다. 2009년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당선에 선거 부정 의혹을 제기한 ‘녹색 운동’ 사태 이후 최대 규모다. 당시 시위를 주도한 것은 당시 야권 후보 미르호세인 무사비 전 총리 등 개혁파 정치 세력이었다. 정부의 강경 진압에 밀렸던 시민들은 2013년 대선에서 온건파 하산 로하니 대통령 선출로 변화에 대한 열망을 드러냈다.

2009년 녹색 운동 이후 최대 규모 시위 

이번 시위는 녹색 운동 이후 8년, 로하니 대통령 선출 이후 4년 동안 피부로 느낄 만한 변화가 없었다는 실망에서 출발했다. 로하니는 당선 첫해 이란 핵협상 잠정 타결을 끌어내고 그 대가로 경제제재 완화 등을 이끌어냈지만 만성적인 민생고를 해결하진 못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이란 실업률은 2017년 1분기에 12.6%를 기록, 그 전해에 비해 소폭 올랐다. 15∼29세의 청년 실업률은 24%를 웃돈다. 여기에 지난해 12월 발표한 새해 정부 예산안에 기름값 50% 인상과 저소득층 보조금 삭감이 포함되면서 서민층의 불만이 폭발했다.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활용이 보편화된 제3세대(나슬레 세봄)가 인구의 주축이 된 것도 배경이다. 1979년 이슬람혁명과 이란-이라크전쟁(1980~88) 이후 각각 베이비붐을 이룬 이란은 인구 8200만명 가운데 절반이 35세 이하로 추정된다. 이들을 중심으로 한 인터넷 보급률은 중동에서 높은 편인 70%에 이른다.

『이란 도시 젊은이, 그들만의 세상 만들기』(2017)의 저자 구기연 서울대 비교문화연구소 박사(이란학 전공)는 “이번 시위에서 달라진 것은 모두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있다는 점”이라며 “각자가 1인 미디어로서 시위 진압 동영상을 공유하고 다음 시위 장소를 알린다. 유명 텔레그램 채널에 하루 150개 이상 관련 영상이 올라오고 있다”고 전했다.

때문에 로하니 정부는 시위 확산 차단을 위해 텔레그램 차단을 시도하기도 했다. 텔레그램을 통해 화염병 제조법 등이 돌고 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텔레그램 측은 서비스 차단을 거부했고 지난달 30일 일부 두절됐던 서비스도 다시 개시된 상태다.

하메네이 등 신정 체제 비판으로 확산 

애초에 ‘독재자에게 죽음을’로 시작됐던 시위 구호는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등 고위 성직자와 신정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되고 있다. 시위대 피켓에서 시리아·레바논을 지원하는 외교정책에 대한 항의가 보이는 것도 주목할 지점이다. 구 박사는 “이란인들은 ‘우리가 배고픈데 지금 누굴 돕느냐’는 불만으로 팽배해 있다”면서 “애초 반정부 시위를 지지했던 보수파까지 싸잡아 시위 대상이 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이란의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오른쪽)와 하산 로하니 대통령, 가운데는 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을 이끈 이맘 호메이니 초상화.

이란의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오른쪽)와 하산 로하니 대통령, 가운데는 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을 이끈 이맘 호메이니 초상화.

로하니 대통령은 시위 배후 세력으로 외세 개입을 지목하고 있다. 1일엔 “외국에서 지령받은 소수의 폭도에 맞서 단합된 이란은 단호하게 맞설 것"이라는 성명을 냈다. 로하니 대통령은 전날 폭력 시위를 선동하는 배후로 미국·이스라엘·사우디아라비아를 거론하기도 했다. 하메네이 최고지도자 역시 2일 성명을 통해 "이란의 적들이 뭉쳐 돈과 무기 등 모든 수단을 이용해 이란에서 불안을 야기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트럼프 연일 트윗 "미국이 지켜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일 이란 소요 사태와 관련해 올린 트윗. [트위터 캡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일 이란 소요 사태와 관련해 올린 트윗. [트위터 캡처]

취임 전부터 버락 오바마 전임 정부의 대이란 정책을 폄훼해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 시위에 손뼉치며 환영하는 분위기다. 시위 발발 이래 거의 매일 관련 트윗을 날린 트럼프는 2일 “이란인들이 잔인하고 부패한 체제에 드디어 저항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어리석게 준 돈(핵 합의 대가)은 테러리즘과 그들 '주머니'로 들어갔다”고 썼다. 이어 “사람들은 식량이 거의 없고 인플레이션에 인권도 없다. 미국이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트럼프는 1일엔 “위대한 이란인들은 오랫동안 억압당했고 음식과 자유에 굶주려있다. 변화를 위한 시간!"이라고 올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후 사우디아라비아의 실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긴밀한 관계 속에 오바마 정부의 중동 정책에서 단절하는 전략을 폈다.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언한 것을 비롯, 트럼프식 중동 정책에는 시아파 맹주를 자처하는 이란을 고립시키는 내용이 핵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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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강경 진압 땐 미, 신규 제재 가할 듯 

30일(현지시간)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선 반정부 시위에 맞선 강경파들의 친정부 집회가 열렸다. [AP=연합뉴스]

30일(현지시간)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선 반정부 시위에 맞선 강경파들의 친정부 집회가 열렸다. [AP=연합뉴스]

나아가 이란 정부가 시위를 강경 진압할 경우 인권침해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이 신규 제재를 부과할 수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새 제재는 이란 일반 국민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이슬람 혁명수비대를 겨냥하게 될 전망이다.

또 기존 이란핵 합의가 미국의 이해에 부합하는지 다음 주내 의회에 통보해야 하는 트럼프의 결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2015년 제정된 이란핵합의재검법(INARA)에 따르면 미국 대통령은 90일마다 이란의 핵 합의 이행을 의회에 보고하고 의회는 이를 근거로 60일 이내에 대이란 제재 재개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앞서 트럼프는 이란핵 합의를 '최악의 합의'로 부르며 지난해 10월 '불인증'을 선언한 바 있다.

WSJ은 "이란이 IS(이슬람 국가) 퇴각 이후 중동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핵 합의에 대한 불만을 제기한 이후 미국과 이란 관계는 급격히 달라져왔다"며 "새로운 조치들은 양국 관계를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트럼프의 ‘부추김’ 트윗 등 섣부른 개입이 이란 사태를 더 악화시킬 거라는 우려도 나온다. 이란 국민들이 트럼프에 대한 신뢰가 없는데다 트럼프 중동 정책에 상당한 적개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오바마 행정부 때 백악관 중동담당 코디네이터로 일한 필립 고든 미국외교협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 선임 펠로우가 뉴욕타임스(NYT)에 밝힌 것도 비슷한 지적이다.

그는 '트럼프는 이란 시위대를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 침묵하라'란 기고문에서 “만약 이란인들이 외부 도움을 원할지라도 그것이 미국의 도움은 아닐 것”이라며 미국이 이란의 적대국인 사우디아라비아나 이스라엘과 가깝다는 것이 알려진 상황에서 트럼프의 침묵이 더 현명한 전략일 수 있다고 조언했다.

※나슬레 세봄=‘제3의(세봄) 세대(나슬레)’라는 뜻의 이란어. 팔레비 왕정 시절 1세대를 지나 1979년 이슬람공화국 수립에 참여했던 2세대의 자녀뻘에 해당한다. 80년대 이후 태어난 이들 3세대는 이슬람 신정일치 교육에도 불구하고 세계화 감응도가 높고 인터넷 활용이 자유로운 편이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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