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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민간 기업 다시 국유화 바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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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러시아에서 '국가자본주의'의 바람이 거세다. 공산주의 체제의 소련이 붕괴한 뒤 빠른 속도로 민영화됐던 사기업들이 다시 국영기업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에너지산업 분야에서 일기 시작한 재국유화 바람은 최근 자동차.제철.항공기 등 주요 기간산업으로 급속히 확산하고 있다고 현지 언론들이 전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가 다시 통제경제로 되돌아가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있지만 러시아 정부는 "낙후한 국가 기간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한다.

◆ 거세지는 국유화 바람=블라디미르 푸틴(사진)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달 21일 국내 주요 항공기 제작사들을 2007년까지 모두 통합해 하나의 거대 국영기업으로 만드는 내용의 대통령령에 서명했다. '통합 항공사'라는 이름의 이 회사는 전투기 제작사인 미그와 수호이, 민항기.수송기 제작사인 일류신.투폴레프 등을 모두 합병할 예정이다. 러시아 정부가 지분의 70% 이상을 보유하게 된다.

빅토르 흐리스텐코 러시아 산업에너지부 장관은 "우리의 목표는 통합 항공사를 연매출 60억 달러(약 6조원) 이상의 세계적 기업으로 키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항공방위우주산업(EADS) 러시아지부 지사장인 바딤 블라소프는 "이 회사는 러시아의 모든 항공업체를 거느리고 항공 부품까지 일괄 생산하는 '공룡 기업'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에 앞서 지난해 말 러시아 국영 무기수출 회사인 로스오보론엑스포르트는 민간 자동차 업체인 아프토바즈와 카마즈의 경영권을 확보했다. 이 회사는 러시아의 세계적 티타늄 생산 업체인 VSMPO-아비스마도 사들일 예정이다. 일부 민간기업이 VSMPO를 매입하려 하자 정부는 검찰과 세무당국을 동원해 세무조사를 하는 등 국유화를 위한 압력을 가하고 있다. 이 밖에 민간 금속회사인 노릴스크 니켈을 국영 다이아몬드 업체 알로스가 인수할 것이란 소문도 꼬리를 물고 있다.

◆ 에너지산업 국유화가 신호탄=국유화 바람은 먼저 에너지산업에 불어닥쳤다. 정부가 민간 석유기업인 유코스를 세무조사하고 소유주를 구속한 것도 결국 이 회사를 국유화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 증거로 전문가들은 2004년 말 국영 석유회사 로스네프티가 몰락한 유코스의 최대 자회사인 유간스크네프테가스를 흡수한 것을 든다. 그로부터 약 1년 뒤 러시아 최대 국영 가스회사 가스프롬이 러시아 5위 석유기업 시브네프티를 매입했다.

이로써 러시아 전체 석유산업의 30% 이상이 사실상 국유화됐다.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론 러시아의 모든 석유.가스회사가 가스프롬과 로스네프티로 통합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 국가 통제 강화=흥미로운 현상은 국영화된 기업들의 주가가 크게 뛰고 있다는 점이다. 증권사들은 정부가 50% 이상의 지분을 확보하거나 인수를 추진 중인 회사의 주식을 '블루칩'으로 분류해 투자를 적극 권장하고 있다. 러시아 증권가에선 '정부와 함께 투자하라'는 말이 올해 최대의 화두다.

대규모 국유화 정책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일부 전문가는 "낙후한 국가기간산업을 단시일에 육성해 국제적 경쟁력을 갖추도록 하기 위해선 국영화와 기업 통합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다른 전문가들은 "세계적 추세인 자유시장경제의 원칙을 거스르는 국유화는 오히려 기업 경영의 효율을 떨어뜨릴 뿐"이라고 지적한다.

유철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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