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인가 오만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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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노태우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할 미국 경축사절로 「제임즈· 베이커」 재무장관이 결정됐을 때부터 한국측은 착잡한 기분들이었다.
그러나 미국국내외 형편상, 행정부내 서열상 공교롭게 그가 가지 않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체 속마음을 내색할 수도 없었다.
「조지· 부시」 부통령은 대통령후보 지명전 때문에 코가 석자나 빠진 격이고, 「조지· 슐츠」국무장관은 모스크바의 미소외상회담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분쟁 해결을 위한 중동 방문으로 눈코뜰 새가 없는 형편이었다. 서열상 그 다음인 재무장관이 사절로 선정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서울에서 모두들 미 재무장관이 온다는데 대해 한 가닥 염려를 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남의 잔칫집에 축하하러 와서까지 분쟁거리를 끄집어내 이문을 챙겨가겠다고 대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경조사에 관한 한 평소 갈등과 설혹 원한이 있더라도 일단 뒤로 물려놓는 동양과 한국인의 범절을 그가 혹시 외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들이었다.
한국 쪽의 우려는 괜한 기우가 아니었다. 그는 연미복을 입고 손님을 맞는 주인에게 전투복으로 대들었다. 상대의 의식구조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였는지, 아니면 이를 무시한 오만이었는지는 본인만이 알 일이다.
무지와 오만의 구분이 어려운 미국인의 행동은 비단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슐츠」장관이 서울을 방문, 외무장관을 만나러 갔을때 이들은 혹 폭발물이 있을지 모른다고 셰퍼드를 앞세웠다. 「슐츠」장관이 모스크바의 「셰바르드나제」 외상 방에 갈 때 셰퍼드가 설쳤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무지였건, 오만이었건 이 같은 행동은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자행되는 것만은 확실한 셈이다.
「베이커」장관에 관할한 상대 이해노력은 끝까지 부족한 느낌이다. 그는 워싱턴에 돌아온 후 한 회견에서 미 생명보험합작 진출문제 해결을 서울 방문 성과로 과시하면서 덧붙여 대한통상 압력에도 불구하고 대한 안보공약은 변함이 없다고 생색을 냈다.
미국은 요새 자주 한국민의 반미감정 대두를 우려한다. 피차의 감정과 의식구조에 대해 이해 노력이 없는 한 개선은 기대하기가 어렵다. 【한남규<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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