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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씨름만 하다 다시 흐지부지 될 듯|야권통합 왜 좌초의 길로 접어들었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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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월23일의 두 김씨 회동으로 본궤도에 올랐던 야권통합협상이 다시 좌초의 길로 접어든 배경은 한마디로 말해 두 김씨 측의 상호 불신과 김대중씨의 단기적 정국 주도전략, 그리고 의원들의 소선거구제 기피현상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통합난망 상태에서 통합의 돌파구를 연 것은 김영삼씨가 그전과는 달리 김대중씨와 공생하겠다는 자세로 전환, 통합의 장애요인이 됐던 소선거구제 수용, 3자 통합, 지분의 반분 등을 대폭 양보했기 때문이다.
소선거구제 반대의사가 지배적이었던 민주당의원들도 불만은 강했지만 명분에 밀려 두 김씨 합의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김대중씨가 통합 후 2선 후퇴라는 거듭된 언약을 파기,2월29일의 두 김씨 회동에서 두 김씨 공동대표제를 제의하고 지난 1일 평민당 당론으로 공식화하자 사태는 순식간에 반전됐다.
소선거구제를 거부해온 다수의 민주당의원들이 평민당 의원들의 「연대적 동의」속에 김대중씨의 「과욕」을 빌미로 통합 와해 쪽으로 의견을 집약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폭발된 것이 2일의 5시간에 걸친 민주당의원총회였다. 명분은 김대중씨의 통합 의지를 의심한다는 형태였으나 사실은 소선거구제 반대가 본심이었다.
민주당 측은 이에 따라 두 김씨의 공동대표제 철회는 물론 평민당 총재직의 즉각 사퇴가 없는 한 통합논의는 무의미하고, 나아가 선거법 등 현안은 당내의 민주적 절차에 따라 결정되어야하며 통합의 어떠한 전제조건도 강력히 배제돼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의원총회는 사실상 소선거구제반대를 결의한 셈이 됐고 그 결과 김영삼씨의 민주당내 영향력은 땅에 떨어진 꼴이 됐다.
지도체제를 놓고 어떤 대안이 제시되든 간에 절충 가능성은 거의 없어 통합은 미궁 속에 빠졌다.
여기에 민정당 측이 8일의 임시국회 회기 안에 선거법안을 처리해버리면 통합움직임은 그 날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김대중씨는 왜 순항의 통합협상에 찬물을 끼얹은 두 김씨 공동대표제를 제기했을까가 궁금사가 아닐 수 없다.
김대중씨의 언행과 측근들의 말을 종합하면 몇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
첫째는 그의 단기 승부 전략이다. 김대중씨는 5년 후는 도저히 바라볼 수 없다는 구도아래 올림픽 후 있을 노태우 정권의 신임투표에 한판승부를 걸겠다는 전략인데 이를 이번 총선거로 앞당겨 시험해본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풀이다.
아직도 고리로 걸고 있는 지난 대통령선거 부정시비를 소선거구제에 의한 총선거실시의 극심한 후유증과 연결시켜 강력한 대여공세를 증폭시키면서 지자제 전면실시 투쟁 및 광주사태시비 등과 연계시키는 기폭제로 활용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는 김대중 총재 주변의 분석이다.
김대중씨가 소속의원들의 불만과 반대에도 소선거구제 당론을 고수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
둘째는 김대중씨의 민주당 와해 전술이라는 관측이다.
민주당은 소선거구제→중선거구제→1구1∼3인제 수용→소선거구제 회귀라는 갈팡질팡식 당론 변경을 해 입장이 말이 아니고 그 과정에서 김영삼씨의 이미지는 금이 갔다고 김대중씨가 판단했음직하다는 분석이다.
따라서 김대중씨는 김영삼씨와 민주당 측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통합일보직전에 제기함으로써 민주당내의 혼란 야기는 물론 의원들에 대한 김영삼씨의 지도력 약화를 명확히 드러낼 수 있다는 술수적 차원으로 나왔다는 지적이다.
말하자면 김대중씨 측은 소선거구제 당론으로 볼 재미는 다 봤을 뿐만 아니라 김영삼씨를 완전히 멍들게 하는데도 성공했고 김영삼씨 없는 민주당은 최근 당 운영상이 보여주듯 서서히 와해되는 지경으로 빠져들고 있기 때문에 당초부터 마음에 없던 통합에 더 이상 연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음직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은 김대중씨가 총선거후 통합 전당대회 때 당권에서 평민당 측이 밀려나지 않기 위한 제동장치로 제기했다는 평민당 당직자들의 설명이다.
김영삼씨가 자신의 대리인으로 통합야당총재를 세우고 총선거를 치른 후 특유의 밀어붙이기 식으로 평민당 측 고사전술을 구사한다면 김대중씨 자신은 물론 평민당 측은 일순에 설 땅이 없어질 것이므로 최소한 자기 측에 유리한 방향으로 미리 당권 포석을 해 놓자는 속셈이다.
통합야당의 출현으로 김대중씨를 정계에서 은퇴시키려던 김영삼씨의 속셈은 미리 그 수를 안 김대중씨 측의 반격을 받아 권위손상과 지도력 급락이라는 2중적 타격만 입은 셈이 됐다는 분석이다.
민주당의원들은 물실호기라는 듯 소선거구제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기 때문에 김대중씨가 지금 당장 사퇴하지 않는 한 통합실현 가망성은 거의 불투명해졌다는 게 민주당 측의 공통된 인식이다.
따라서 야권통합은 다시 속절없는 명분싸움으로 말씨름만 하다가 총선거를 맞아 유야 무야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돼가고 있다. <이수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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