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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추적]1㎝ 쪽지문에 덜미, 12년전 강릉 살인사건 진실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2년 전 강릉에서 발생한 노파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쪽지문. [사진 강원지방경찰청]

12년 전 강릉에서 발생한 노파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쪽지문. [사진 강원지방경찰청]

14일 오후 강원도 춘천시 효자동 춘천지법 101호 법정. 하늘색 수의를 입은 정모(50)씨가 법정에 들어섰다. 정씨는 12년 전 발생한 강릉 노파 살인사건의 현장에 남은 1㎝의 ‘쪽지문(일부분만 남은 조각지문)’ 때문에 검거돼 국민참여재판을 받게됐다.

경찰청 증거분석계 3000개 유사지문 분석 #흐릿한 융선 뚜렷하게 만들어 용의자 특정 #정씨 범행 전면 부인, 국민참여재판 받는다

국민참여재판은 지난달 12일 열린 첫 재판에서 정씨가 신청했다. 정씨는 “당시 범행 현장에 간 적이 없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피고인석에 앉은 정씨는 국민참여재판에 참여한 11명의 배심원과 판사를 번갈아 봤다. 검사가 나와 사체검안서와 피해자 가계도, 발견자 진술 등에 관해 설명하자정씨는 멍하게 앞을 주시했다.

이어 검사가 장씨가 숨진 모습이 담긴 범행 현장 사진을 보여주자 배심원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일부 배심원은 놀라 손으로 입을 가리거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정씨는 덤덤한 표정으로 사진을 바라봤다.

강릉 노파 살인 사건 현장 모습 [사진 강원지방경찰청]

강릉 노파 살인 사건 현장 모습 [사진 강원지방경찰청]

정씨는 12년 전인 2005년 5월 13일 낮 12시 강릉시 구정면 덕현리에 사는 장모(당시 69세·여)씨의 집에 침입해 장씨를 수차례 폭행하고 포장용 테이프로 얼굴 등을 감아 살해한 뒤 78만원 상당의 귀금속을 훔쳐 달아난 혐의로 기소됐다.

당시 이 집에 혼자 살고 있던 장씨가 손발이 묶인 채 숨져 있는 것을 이웃 주민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현장에 출동했을 당시 장씨의 얼굴에는 포장용 테이프가 붙여져 있었고, 손과 발은 전화선 등으로 묶여 있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부검 결과 장씨의 사망 원인은 기도 폐쇄와 갈비뼈 골절 등 복합적인 원인이었다.

검찰은 이날 국민참여재판에서 숨진 장씨가 사건 전날까지 반지 등 귀금속을 착용하고 있었던 모습을 목격한 이웃의 진술 등을 설명했다.

또 범행이 일어난 2005년께 어려웠던 정씨의 경제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도 공개했다.

강릉 노파 살인사건 용의자가 범행에 사용한 포장용 테이프. [사진 연합뉴스]

강릉 노파 살인사건 용의자가 범행에 사용한 포장용 테이프. [사진 연합뉴스]

장기 미제 강력사건으로 남아있던 이 사건은 1㎝의 ‘쪽지문’이 사건을 해결하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됐다.

저항하는 장씨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포장용 테이프에 쪽지문이 흐릿하게 남아있었다. 하지만 ‘융선(지문을 이루는 곡선)’이 뚜렷하지 않아 당시 지문 감식 기술로는 쪽지문의 주인을 찾을 수 없었다.

과학수사가 발달하면서 경찰은 지난 9월 경찰청 지문자동검색시스템(AFIS)에 해당 쪽지문을 재감정한 결과 지문의 주인이 정씨라는 것을 확인했다. 경찰청 증거분석계는 범인 검기를 위해 유사한 지문 3000여개를 비교했다.

경찰은 12년 만에 유력 용의자로 검거된 정씨가 당시 사실혼 관계의 여성이 사기 사건으로 구속되자 경제적 어려움을 겪다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봤다.

대전지방경찰청 벽면에 로카르의 법칙으로 알려진 문구. [사진 연합뉴스]

대전지방경찰청 벽면에 로카르의 법칙으로 알려진 문구. [사진 연합뉴스]

경찰은 주변인 조사를 통해 범행 시간대에 자신이 운영하는 동해시의 소주방에 있었다는 정씨의 알리바이가 거짓이었던 것을 밝혀냈다. 또 3차례 거짓말 탐지기를 시행한 결과 모두 ‘거짓’ 반응이 나온 것도 확인했다.

하지만 정씨는 “장씨를 살해한 범인이 금품을 강탈했다는 증거가 없어 강도살인으로 볼 수 없다. 장씨가 범인의 발에 배 부위를 차여 후복막강 출혈 및 신장 파열로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므로 살인의 고의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이날 법정에 증인으로 선 법의관은 “숨진 장씨의 경우 손상(후복막강 출혈) 자체를 보고서는 이것으로 충분히 사망할 수 있다고 볼 정도는 아니다”라며 “코와 입이 완벽하게 막히지 않았고, 코가 어느 정도 뚫려 있더라도 기존 호흡양보다 절반 이하로 저항이 증가한 상태가 된다면 차츰차츰 의식을 잃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이번 국민참여재판의 쟁점은 정씨가 노파를 살해한 범인이 맞는지, 노파의 귀금속을 정씨가 훔쳤는지, 노파를 때리고 테이프로 결박해서 숨지게 한 살인의 고의가 있는지 등이 주요 쟁점이 될 전망이다.

춘천지법 관계자는 “이번 국민참여재판의 경우 정확한 사망원인이 살인의 고의성 여부를 판단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강도살인 혐의로 구속기소 된 정씨의 국민참여재판은 이틀간 진행돼 15일 늦은 오후에 결과가 나올 예정이다.

춘천=박진호 기자 park.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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