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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제주기지 불법시위 단체에 34억 받아낼 권리 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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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낙연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이 12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세종-서울 간 영상 국무회의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정부는 이날 제주 강정마을 구상권 청구소송을 철회하는 법원 ‘강제조정안’을 수용했다. 오른쪽부터 김영록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이 총리,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연합뉴스]

이낙연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이 12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세종-서울 간 영상 국무회의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정부는 이날 제주 강정마을 구상권 청구소송을 철회하는 법원 ‘강제조정안’을 수용했다. 오른쪽부터 김영록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이 총리,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연합뉴스]

정부가 제주 해군기지 공사를 불법시위로 방해한 강정마을 주민과 시민단체를 상대로 낸 34억5000만원의 구상권 청구 소송을 그만두기로 했다. 구상권 소송은 채무를 먼저 갚은 측이 채무의 원인 제공자에게 그 책임만큼의 돈을 청구하는 소송이다.

공사 방해 구상권 소송 철회하기로 #법원 조정안 수용 … “분열 끝내야” #문 대통령 대선 공약 영향 미친 듯 #사드 반대 시위 주도 ‘평통사’ 포함 #한국당 “불법에 면죄부, 법치 훼손” #건설사 메워준 돈 결국 국고 손실로

정부는 12일 이낙연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이같이 결정했다. 법원의 강제조정안을 수용하는 형식이다. 앞서 제주 해군기지 구상권 소송을 맡은 서울 중앙지법 민사합의14부는 지난달 30일 “원고(정부)는 소를 모두 취하하고, 원고와 피고(주민·시민단체)는 제주 해군기지 건설 공사와 관련한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강제조정안을 내놨다. 주민과 시민단체도 강제조정안을 받아들이면 정부의 구상권 청구 소송은 바로 취하된다.

이로써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6월 28일 강정마을이 해군기지 부지로 확정된 뒤 불거진 주민과의 분쟁이 10년여 갈등 끝에 매듭지어지는 모양새가 됐다.

그러나 정부 결정을 둘러싼 적절성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정부의 구상권 청구 대상은 개인 116명과 5개 단체다. 개인 가운데 강정마을 주민은 31명인 것으로 국방부는 파악했다. 5개 단체는 ‘강정마을회’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평통사)’ ‘개척자들’ ‘제주참여환경연대’ ‘생명평화결사’ 등이다. 이 중 평통사는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반대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한 반대 시위를 주도한 단체다.

국방부와 해군은 당초 소 취하 대가로 주민과 시민단체의 사과와 공사 방해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강제조정안에는 “원·피고는 상호 간에 화합과 상생을 위해 노력한다”고만 돼 있다. 사과 한마디 듣지 못하고 돈도 못 받아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게다가 정부 손실은 더 늘어날 수도 있다. 이번 구상권 청구는 삼성물산이 공사가 늦어져 본 손실 275억원을 정부가 방위력개선비로 물어준 뒤 지난해 3월 제기했다. 275억원 중 34억5000만원이 이들이 125일간 벌였던 불법 시위 때문에 발생했다고 본 것이다. 다른 시공사인 포스코건설·대림건설도 정부를 상대로 공사 지연에 따른 손해배상을 청구하거나 중재를 요청한 상태다. 이날 결정으로 정부는 관련 소송·중재 결과에 따라 건설사에 막대한 돈을 물어주게 되더라도 주민·시민단체들에서 일부라도 받아낼 수 없게 됐다.

당장 ‘정부가 불법 시위에 면죄부를 준다’는 비판이 나온 까닭이다. 서정욱 변호사는 “국민의 세금을 운용하는 정부가 구상권을 포기한다는 것은 직무유기이자 국고 손실을 방관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구상권 소송 포기로 받아내지 못하게 된 34억5000만원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별도 대책이 마련된다. 구체적 내용을 말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결국 정부 예산, 즉 세금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장제원 자유한국당 수석대변인은 “불법 전문 시위꾼들에게 면죄부를 줘 계속 불법시위를 하도록 용인하는 것”이라며 결정 취소를 요구했다.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 법원의 결정이란 걸 부각하며 “정부가 자진해 취하하면 배임죄를 지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한 꼼수로 법원의 강제조정을 수용하는 모양새를 취한 것이다. 꼼수를 부리는 정부나 불법시위에 면죄부를 주는 법원이나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들기는 마찬가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는 이에 대해 “구상권 철회를 촉구하는 국회의원과 제주도지사·지역사회의 의견을 고려했다”며 “사법부의 중립적 조정 의견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선은 결국 청와대로 향한다. 구상권 청구 소송 철회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대선 당시인 지난 4월 18일 제주 유세에서 “소송을 철회하고 처벌 대상자는 사면하겠다”고 약속했다. 법원의 결정도 결국 정부의 뜻이 반영된 게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부장판사 출신의 변호사는 “강제조정안은 판사가 임의로 결정하지 않고 원·피고의 의견을 반영한다”며 “구상권 소송 취하에 대해 원고인 정부가 사전 동의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소극적이었을 것이란 얘기다.

청와대는 그동안 구상권 청구 철회에 대해 “법원이 판단할 사안으로 정부는 개입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청와대가 실제 ‘보이지 않는 손’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제주도의회 의장을 지낸 문대림 청와대 제도개선비서관은 “강정마을 문제도 공식적으로 민원으로 접수된 사안”이라며 “갈등 해결 조정 차원에서 들여다봤다”고 말했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그의 제주지사 출마설이 들린다.

향후 문 대통령의 공약에 따라 제주 해군기지 불법행위 사법처리 대상자에 대한 사면이 이뤄질 가능성이 커졌다. 지난해 6월 현재 제주 해군기지에 대한 불법행위로 모두 601명이 기소됐고, 이 중 57명이 구속됐다. 문 대통령은 지난 8일 종교 지도자 초청 오찬 간담회에서 “사면을 한다면 서민·민생 중심으로 해서 국민 통합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강정마을회는 12일 “정부가 법원의 조정 결정을 수용한 것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주민들은 “정부의 이번 결정이 마을 공동체 회복과 제주도의 해군기지 사업과 관련한 명예회복과 진상조사가 제대로 추진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제주 해군기지 갈등의 10년사

● 2007년 4월 26일 강정마을회, 총회를 열고 해군기지 유치 결정
● 2007년 6월 22일 노무현 전 대통령, 제주평화포럼에서 “제주 해군기지는 필요하다”고 강조
● 2007년 6월 28일 국방부, 강정마을을 해군기지 부지로 확정
● 2010년 1월 29일 해군, 제주 해군기지 착공
● 2011년 8월 29일 법원, 해군의 제주 해군기지 공사 방해 금지 가처분 신청을 일부 인용
● 2011년 9월 29일 문재인 당시 노무현재단 이사장, “제주 해군기지, 노무현 정부 때 첫 단추 잘못 채워져”
● 2012년 7월 5일 대법원, 국방·군사시설 사업실시계획 승인처분 무효 확인 소송에서 국방부 손 들어줘
● 2016년 2월 26일 제주 해군기지 준공식
● 2016년 3월 28일 정부, 개인 116명과 5개 단체 상대로 구상권 청구 소송 제기
● 2017년 4월 18일 문재인 당시 대선후보, 제주 유세에서 “구상금 청구소송을 철회, 처벌 대상자 사면”
● 2017년 6월 28일 제주도지사와 지역사회 87개 단체, 강정마을 구상권 철회 건의문 청와대에 제출
● 2017년 11월 30일 법원, “소 취하하고, 일체 민·형사상 청구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강제조정문 송달

이철재·위문희·김선미 기자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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