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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대통령」에 바란다<9>-전택부<YMCA 명예총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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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노태우 차기대통령 당선자는 선거유세 때는 물론 당선 이후에도 줄곧 「보통사람」의 시대를 정치구호로 삼아왔다. 그리고 그 자신부터 권위주의를 청산한다는 결심아래 제6공화국의 초대국무총리로 대학교수 출신의 이현재씨를 택한 것도 퍽 마음에 들었다.
이현재 총리 내정자는 보통사람 대통령에 아주 걸맞는 보통사람 총리의 인상이 짙기 때문이다.
그는 청빈한 외길인생의 학자이며, 서울대학 총장을 그만두고 총장공관을 떠나 초라한 자기 집으로 이사할 때 대학측에서 차량을 주겠다고 제의했으나 이를 사양할 정도로 공인의식에 철저했고 가정에서는 85세의 노모에게 효자라는 소문이 자자하다.
이만하면 우리의 학원사태도 잘 수습해 줄줄 안다.
조선조 초기의 명재상 황희(1363∼1452)는 불량한 아들로 인해서 골치를 앓았다. 문제아중의 문제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을 엄하게 다스리지 않고 자애와 유머로 다스렸다. 그래서 하루는 아들이 늦게 만취하여 귀가할 즈음에 의관속대차림으로 문밖에서 기다렸다. 드디어 아들이 나타나자 『어서 들어갑시다』며 맞아들였다.
아들이 깜짝 놀라면서 『아버님 웬일이십니까』고 몹시 당황하자 『내 집에 귀한 손님이 오랜만에 오시는데 정중히 맞아들이는 것이 예가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후로 그 아들은 바로 잡아졌다는 것이다.
요즘 대학의 지도교수들은 『내 자식도 마음대로 못하는 세상에서 어찌 남의 자식들을 잘 다스릴 수 있겠는가』면서 지도교수직을 기피하는 폐단이 있는데 모든 대학교수가 황희 정승처럼만 한다면 학원사태도 문제없을 것이다.
노태우 차기대통령 당선자는 이현재 총리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매사를 성실하고 따뜻하게 해나가자』고 했다는데, 여기에 깊은 뜻이 있다고 본다.
정치란 쉽게 말해서 백성들을 따뜻하게 만드는 일이다.
옥편을 찾아보면 정치(정치)의 정자는 이법정민 즉「법을 가지고 백성을 바르게 한다」는 뜻에서 「바르게할 정」자라 풀이했고, 치자는 이야 즉「순리로 백성을 다스린다」는 뜻에서 「다스릴 치」자라 했다. 그런데 「다스릴 치」(치)자의 「다스린다」는 우리 토박이말의 어원은 「따스하다」의 어원과 같다는 것이 학자들의 말이다. 그러고 보면 「다스린다」는 것은 결코 힘으로 몰아붙이거나 강권으로 백성들을 억압하고 처벌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겠다. 흔히 통치권자들이 툭하면 『엄히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다스린다의 어원을 잘 모르고 하는 말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수신재가치국평천하의 이론과도 통하는 이론이다. 훌륭한 정치인이 되려면 우선 악을 물리치고 선을 북돋워 자기의 심신을 닦고, 자기 가정을 잘 건지고 화합케 해야만 백성들을 따스하게 만들수 있다는 것이며, 그래야만 세계평화에 기여하고 안정시킬수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정치인들은 화려하고 거창한 정치구호만을 내세우니 그게 탈이다. 지난번 대통령선거전 때 대권을 노리던 사람들만 해도 어떤 입후보자는 자기는 「위대한 머슴」이라 스스로를 낮추고, 어떤 입후보자는 「국민을 하늘같이 모시겠다」고 겸손을 약속하고, 어떤 입후보자는 「보통사람의 시대」를 열겠다고 다짐했으나 그중 누구가 제일 사생활이나 공생활에서 부드럽고 따스한 분위기 조성을 해왔는지를 국민들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지켜보았던 것이다.
제6공화국에 바라는 것은 역시 평화적인 남북통일이다. 남북통일은 우리 겨레의 지상명령인 동시에 전세계인류의 염원이기도 하다. 그런 뜻에서 홍성철씨가 새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뽑힌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는 독실한 카톨릭신자로서 지난 85년9월 남북한 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평양에 도착, 39년만에 누님을 만났으나 짧은 만남과 분단의 비애를 참을길 없어 숙소였던 고려호텔안에서 미사를 가진 다음 밖에 나가서 누님과 함께 중천에 떠있는 달을 쳐다보면서 우리가 다시 갈라지지만 저 달을 통해 애정을 나누자고 했다고 한다.
서울에 되돌아와 추석날 온식구와 일가친척이 정원에 나가 달을 쳐다보면서 울었다. 그리고 방에 들어와 같이 식사를 할때는 누님을 위해 방석 한자리를 비워놓고 식사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끝으로 노태우 차기대통령은 「보통사람」의 정치철학을 꾸준히 구현함으로써 우리겨레가 고루고루 잘 살고, 다함께 선량한 국민이 되고, 미움과 질투, 불신과 욕심, 독선과 지역감정을 우리 사회에서 일소하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 애국가에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라는 귀절이 있듯이 노태우 차기대통령은 무엇보다 역사의 주관자인 하느님에 대한 겸허한 태도와 성실하고 정직하고 수수한 「보통사람」의 소리를 귀담아 듣는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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