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까지…'Made in Korea' 노골적으로 견제 나서는 미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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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발(發) 통상압력 파고가 세계 1위인 한국의 반도체 분야까지 덮치기 시작했다.

SK하이닉스 메모리모듈 제조 기술이 #미국 특허 침해했는지 ITC가 조사 나서 #지난달 초엔 삼성 반도체 특허도 조사 #전문가들 "미국 보다 앞선 한국 산업 손보기" #"기업들 생산성 다변화하고 정부도 대응 나서야"

3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SK하이닉스의 메모리모듈 제품이 자국 반도체 업체의 특허권을 침해했는지를 조사하기로 지난달 28일 의결했다. 컴퓨터 주회로판 메모리 슬롯에 설치된 D램 집적회로 등 SK하이닉스의 메모리모듈과 관련 부품들이 미국 반도체 업체 넷리스트의 특허를 침해했는지 조사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조사 대상에는 SK하이닉스 한국 본사와 미국 새너제이에 있는 SK하이닉스 아메리카, SK하이닉스 메모리솔루션 등이 포함됐다.

이번 조사도 '한국과 경쟁하는 미국 기업이 소송을 제기하면 ITC가 나서는' 공식을 따랐다. 넷리스트는 지난 10월 31일 SK하이닉스를 상대로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미국의 관세법 337조는 '미국 기업이나 개인의 지적재산권(IP)을 침해한 해외 제품에 대해 수입 금지를 명령할 수 있다'고 적시하고 있다. 불공정 무역행위를 조사하는 ITC는 조사 기구를 꾸리고 45일 이내에 판정 기일을 잡는다.

업계에서는 "한국과의 경쟁에서 뒤진 미국 업체들이 트럼프 정부의 보호무역 기조를 적극 활용하는 것"으로 분석한다. 넷리스트는 트럼프 당선 전인 지난해 9월 ITC와 캘리포니아 중부지방법원에 SK하이닉스의 서버용 메모리가 자신들의 특허를 침해했다며 소송을 제기했지만 ITC는 최근 "특허 침해 사실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정한 바 있다.

그러나 지난달 미국의 반도체 패키징시스템 전문업체인 테세라가 한국의 삼성전자를 상대로 특허 침해 제소에 나서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테세라는 "삼성전자의 웨이퍼레벨패키징(WLP) 기술이 미국 내 특허 2건을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WLP는 웨이퍼를 개별 칩 단위로 절단해 패키징하는 기존 방식과 달리 패키징 절차를 간소화해 웨이퍼 단계에서 곧장 반도체 완제품을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이렇게 만들면 완제품의 부피가 줄어드는 장점이 있다. 테세라는 제소와 함께 ITC에 자사 특허를 침해한 침해한 삼성 반도체 제품은 물론 이를 탑재한 스마트폰·태블릿·랩톱·노트북 등의 수입금지와 판매 중단을 요청했는데 ITC는 곧장 삼성전자 패키징 기술에 대한 조사에 나섰다.

국내 업계에서는 미국 트럼프 정부의 이런 조치의 배경에는 한국이 미국보다 ‘득 보는 장사’를 하고 있다는 시각이 깔린 것으로 분석한다.
법무법인 테크앤로의 구태언 변호사는 "미국 정부와 미국 기업들은 한국기업들이 메모리 ‘슈퍼 사이클’에 올라탄 채 큰돈을 벌고 있다고 보고 꼬투리 잡기에 나서는 것"이라며 "그러나 한국 기업 못지않게 미국의 업체들도 호황을 누리고 있어 설득력이 약하다"고 지적했다.
실제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올해 1~8월 우리나라의 대미 수출은 455억 9300만 달러(약 52조원), 수입은 346억4800만 달러(약 40조원)로 전년동기 대비 각각 2.5%, 22.4% 증가했다. 수출 증가보다 수입 증가 폭이 9배나 컸다.

이 중 반도체 부문에서도 수입 증가가 두드러졌다. 집적회로반도체(19억9400만 달러)와 보조기억장치(10억3200만 달러)의 수출은 메모리 반도체 호황과 맞물려 각각 67%, 90% 증가했다. 그러나 대미 수입품 중 최대 규모인 반도체 제조용장비(35억5800만 달러)는 전년 보다 수입액이 무려 199% 증가했다. 또 집적회로반도체(24억5700만 달러)를 포함한 반도체 관련 대미 수입 규모는 한국이 미국에 수출한 반도체 제품의 2배에 달했다.
구 변호사는 "한국에서 전자기기 완제품이나 메모리 반도체의 수출이 늘어나면 이를 제조하기 위한 미국산 기계나 장비의 수입 역시 같이 증가한다"며 "전기·전자 분야에서 한미 간 교역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손해 볼 수 있는 산업구조가 아니다"고 설명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한국의 반도체 '빅2'에 ITC가 현미경을 들이대자 국내 산업계는 바짝 긴장하고 있다. 반도체 다음은 누가될지 몰라서다. ITC는 이미 지난달에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세탁기에 대해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발동 권고안을 마련했다. 이에 앞서 한국산 태양광모듈에 관세를 부과해야 한다는 권고안도 확정한 상태다.

재계 관계자는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한 트럼프 행정부의 공세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고 임기 내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며 "대미 수출 의존도가 높은 기업들은 생산선 다변화 등 대책을 마련하고 정부도 외교력과 설득력을 발휘해 방어막 구축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한국 제품은 자동차(155억 달러)였고 자동차 부품(67억5000만 달러), 무선통신기기(약 64억7000만 달러), 반도체, 석유화학제품(18억2000만 달러)이 뒤를 이었다.
박태희 기자 adonis5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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