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시위 격화 … 국가비상사태 선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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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수도 마닐라 시민들이 24일 비상사태가 선포된 뒤 시내 마카티 금융가에서 시위 진압 경찰과 몸싸움을 하고 있다. [마닐라 로이터=뉴시스]

최형규 특파원

24일 필리핀 마닐라 고속도로변의 '피플 파워' 기념탑. 1986년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축출을 기념해 세운 것이다. 이날 오전 탑 주위에 5000여 명의 시위대가 '비리와 무능 정권 퇴진'을 외치며 몰려들었다. 이들은 군경의 바리케이드를 뚫고 탑 점거를 시도했지만 경찰의 물대포에 흩어졌다. 이 사건 직후 글로리아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군부 쿠데타를 적발했다는 발표도 했다.

'피플 파워(People Power: 민중의 힘)'의 명성이 흔들리고 있다. 피플 파워로 들어선 민주정권이 다시 그 힘에 의해 무너질 위기다. 지도자의 비리와 무능을 문제 삼은 민중이 정권 퇴진 요구 시위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86년 2월 25일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정권을 무너뜨린 민중의 힘에 경탄하며 전 세계가 '피플 파워'라는 용어를 쓴 지 꼭 20년을 맞는 마닐라의 혼란스러운 모습이다. 피플 파워는 이듬해 6월항쟁을 겪은 한국 사회에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 국가비상사태 선언=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은 24일 방송 연설에서 단호한 표정으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피플 파워가 정부 전복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아로요는 지난해 부정선거 의혹을 받았다. 경제난에 이어 최근에는 1800여 명의 인명이 희생된 산사태에 대한 정부의 무능한 대처 등으로 민심이 돌아섰다.

아로요 퇴진 요구 시위는 '피플 파워' 20주년 기념일인 25일 정점에 이를 전망이다. 마르코스를 축출한 86년의 제1차 '피플 파워'에 이어 15년 뒤인 2001년 영화배우 출신인 조셉 에스트라다가 2차 피플 파워로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 자리를 이은 사람이 바로 아로요다. 하지만 그런 그가 이젠 피플 파워에 의한 세 번째 희생자가 될 위기를 맞고 있다.

◆ 피플 파워의 피로 현상=지난달 필리핀 여론조사기관인 펄스 아시아(Pulse Asia)가 발표한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다. 국민의 64%가 이제는 '피플 파워'를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응답자들은 피플 파워가 끊임없이 정치 일선에 등장하면서 애초 순수했던 민중혁명의 의미가 사라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필리핀의 저명한 칼럼니스트인 아마토 도로닐라는 "현재의 피플 파워는 민주혁명의 상징이 아니고 사회 불안의 근원"이라고 지적했다. 20년 전 피플 파워의 중심에 섰던 언론인 셰일라 코로넬은 이를 '피플 파워의 피로(Fatigue) 현상'이라고 불렀다. 정권만 전복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생각으로 사회를 고단하게 만들어왔다는 것이다.

◆ 리더십 부재와 개혁 실패로 악순환 반복=필리핀 탐사보도 저널리즘 센터를 이끄는 코로넬은 "필리핀의 불안은 민주화가 덜 되어서가 아니라 정부가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해 경제난 해결과 제도 개혁에 실패한 것이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피플 파워가 다시 등장한 것은 정부의 개혁과 경제정책 실패, 부정부패 등이 한데 어우러져 빚어진 결과라는 평가다.

70년대 아시아 상위권이던 이 나라 경제는 오랜 독재와 정부의 무능으로 현재는 아시아 최악이다. 8400여만 명의 인구 가운데 40% 이상이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사는 절대빈곤층이다.

민중혁명도, 민주화도 지도자의 리더십이 부족해 정부가 무능하고 경제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혼란만 가중시킨다는 점을 일깨우는 사례다.

마닐라=최형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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