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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남한산성에 갇힌 현대차 노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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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문희철 기자 중앙일보 기자
문희철 산업부 기자

문희철 산업부 기자

“청군이 성을 싸고 있는데 어찌 밖이 아니라 안에서 (이조판서를) 죽이라 하는가!”

대립하는 신하들에게 인조는 이렇게 소리 지른다. 청나라·명나라 사이에서 명분 싸움에 골몰하는 조정 대신들을 향한 것이다. 지난달 개봉한 영화 ‘남한산성’은 조선이 청나라 침략을 받은 병자호란(丙子胡亂·1636년)이 배경이다.

현대자동차 노사의 임금·단체협상(임단협)을 취재하다가 문득 이 대사가 떠올랐다. 위기의 본질에 눈을 감은 채 명분 싸움에 골몰하는 게 영화와 흡사해서다. 윤갑한 현대차 사장과 하부영 민주노총 현대차 지부장은 23일 34차 본교섭을 진행한다. 협상을 앞두고 노조는 “재고 84만 대가 쌓인 (실적 부진의) 책임은 부동산 투기 때문”이라고 회사 측에 화살촉을 겨냥했다.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부지 매입에 10조5500억원을 쏟아붓고도 105층 이상의 빌딩 건립에 20조원을 투자하려고 한다”며 “(중국 지리차가 인수한) 볼보도 2조원이면 살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현대차가 17일 노조에 발송한 ‘품질 문제 관련 협조 요청의 건’도 문제 삼았다. ‘품질 의식 수준이 낮다. 조립 불량이 발생하면 안티-현대(Anti-Hyundai) 정서가 확산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회사 측이 이를 노조에만 발송한 것은 아니다. 설계·검수 등 품질 전반을 개선하면서 유관 부서에 일괄적으로 협조전을 보냈다. 노조도 이들 중 한 곳이었다. 그래서 “노조원에게 책임을 전가했다”는 노조 반발을 회사 측은 “자의적 해석”으로 간주했다.

철 지난 ‘네 탓 논쟁’의 배경은 결국 명분 쌓기다. 노조도 지금 같은 경영 위기에서 돈을 더 달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작다고 판단한 듯하다. 실제로 노조는 갑자기 21일 비정규직 피해 사례를 조사하고 법률상담도 시작했다. 현대차 노조는 비정규직을 외면한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현대차 노조 내부에선 이를 ‘대의명분으로 무장한 위력적인 투쟁 전술’이라고 부른다. 비정규직을 보듬는 행보로 대의명분을 쌓으면 사측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도덕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심산이다.

조선은 병자호란을 막을 기회가 있었다. 정묘호란(1627년) 같은 전조(前兆)를 통해 한반도 주변국의 정세 변화를 읽을 수 있었다. 현대차를 둘러싼 상황도 급변하고 있다. 유럽에서 1~10월 도요타 판매량이 14%나 급증했다. 미국에서는 캠리·코롤라 같은 도요타 세단이 쏘나타·그랜저를 대체하는 중이다. ‘인내심의 한계’ 운운하는 현대차 노조가 인내할 대상은 남한산성 밖에 있다.

문희철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