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외환위기 20년의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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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꼭 20년 전 오늘이다. 외환 곳간이 비어 가던 김영삼 정부는 1997년 11월 21일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그해 12월 3일 임창열 경제부총리는 방한한 미셸 캉드쉬 IMF 총재 옆에 앉아 침통한 표정으로 구제금융안에 서명했다. 우리 국민은 그 후 IMF 요구에 따른 긴축과 고강도 구조조정을 견뎌내야 했다. 외환위기는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저성장과 실업이 구조화됐고 경제 주체의 위험 회피 성향은 커졌다.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구조조정이 일상화됐다. 이로 인해 개인은 안정적인 공공 일자리에 매달리고 기업은 파괴적 혁신보다 현상유지형 돈벌이에 눈독을 들였다. 한국 경제 특유의 활력(dynamism)이 외환위기 이후 사라졌다.

지금 한국 경제는 20년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지난달 외환보유액은 3845억 달러로 세계 9위다. 외환위기 당시 투기 등급인 ‘B+’까지 떨어졌던 국가 신용등급은 현재 중국·일본보다 높은 ‘AA’다. 외환위기가 다시 불거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 하지만 언제든지 위기는 다른 얼굴을 하고 찾아올 수 있다. 외환위기와 같은 급성 심장병은 아니지만 한국 경제는 노동생산성 저하, 혁신을 가로막는 규제, 소득 불평등 등의 고질 탓에 이미 고혈압이나 당뇨병 같은 만성 질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국 경제 상황이 ‘(뜨거워지는) 냄비 속 개구리 같다’는 경제전문가가 88%에 달하며 탈출할 시간이 1~3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답변이 63%나 됐다. 지금처럼 경제 여건이 좋을 때 노동개혁 등 구조개혁이 필요하다는 IMF의 조언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개혁이 더딜 때 외신이 한국 경제를 비판하면서 쓰는 말이 ‘자아도취병(complacency)’이다. 항상 경계하고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그게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의 숙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