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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멀리 가는 물’이 되고 싶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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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김종윤 기자 중앙일보 편집국장
김종윤 경제부장

김종윤 경제부장

“국정의 발목을 잡고 개혁을 방해하는 세력은 정권을 교체한 국민의 뜻을 받들어 사퇴하는 게 옳다.”

정권 바뀌었다고 공공기관장 몰아내는 게 오히려 ‘적폐’ #법 따라 임기 보장하고 효율성 높이는 게 멀리 가는 길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문재인 정부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한 달 만인 2008년 3월 당시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한 말이다. 신호탄이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이영희 노동부 장관 등이 잇따라 “전(前) 정부의 정치색을 지닌 공공기관장은 물러나는 게 자연스럽다”고 각을 세웠다.

심지어 청와대는 문체부 업무보고 때 전 정부에서 임명한 한국관광공사 사장과 방송광고공사 사장의 참석을 거부했다. 감사원은 물론 각 부처 특별감사팀도 나섰다. 표적 감사라는 비판이 터져나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시 감사원은 KBS 감사를 통해 정연주 사장에 대한 해임을 요구했다. 이사회는 요구대로 움직였다. 이 해 10월 민주당 백재현 의원실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공공기관장 교체 자료를 발표했다. ‘305개 공공기관 중 191개 기관의 장이 바뀌었다. 이 중 96곳은 사표를 강요해 교체했다.’ 빈 자리에는 전문성 없는 낙하산이 속속 투하됐다.

공공기관이란 게 묘하다. 정부는 아니지만 그 산하에서 돌격대 역할을 한다. 어떤 새 정부가 들어와도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게 ‘국정 철학’이다. 천박한 한국 정치풍토에서 얼마나 대단한 철학을 세웠는지 모르지만 이 한마디에서 비켜가면 개혁 방해 세력으로 찍힌다. 더구나 새 정부는 유권자의 뜻에 따라 ‘선출된 권력’이란 정당성을 앞세운다. 국정 철학을 공유하는 인사가 공공기관의 장이 돼야 한다는 논리는 그래서 나온다.

일견 타당하다고 볼 수 있지만 이 지점에서 법과 현실이 충돌한다. 엄연히 이 나라엔 공공기관의 운영을 체계화한 법이 있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부터 시행한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이다. 이 법에는 공기업과 준정부기관 기관장의 임기를 3년으로 규정했다(28조). 물론 기관장을 해임할 수 있다. 요건은 엄격하다. ‘이사회는 기관장이 법령이나 정관을 위반하거나 직무를 게을리해 직무수행에 현저한 지장이 있다고 판단되면 의결을 거쳐 주무기관의 장에게 기관장을 해임하거나 해임을 건의하도록 요청할 수 있다’(22조). 정권이 바뀌어도 기관장의 임기를 보장해 독립적으로 공공기관을 운영하자는 게 법의 취지다. 이명박 정부는 법을 무시했다. 위법 논란이 일었다.

그렇다고 이명박 정부의 탈선이 문재인 정부에 면죄부를 주는 건 아니다. 현 정부에서도 공공기관장 몰아내기의 음험한 그림자가 서서히 짙어진다. ‘적폐청산’이라는 깃발 아래서다. 쌓인 폐단을 없애는 걸 반대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나와 생각이 다르고 반대편에 섰다고 다 적폐는 아니잖은가. 공공기관 운영의 핵심은 효율성이다. 공공기관이 부실해지면 납세자의 세금으로 메워야 한다. 그런데도 공공기관이 비효율의 극치를 달리는 건 낙하산이란 배경을 타고 내려온 기관장이 있어서다.

정권이 바뀌면 전임 기관장은 전 정권 사람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진 채 쫓겨난다. 빈 자리에는 새 낙하산이 착륙한다. 이게 공공기관 운영의 공식이었다. 정당성 없는 낙하산은 정치권과 노조의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이런 메커니즘이 공기업 채용 비리와 방만 경영의 깊은 뿌리다.

한(恨)풀이식 적폐청산은 또 다른 한을 남길 뿐이다. 대한민국은 법치국가다. 법에 따라 기관장의 임기제를 보장해야 한다. 만약 정부 정책 집행을 대행하는 기관의 경우에 한해 기관장을 바꾸고 싶으면 입법부를 설득해 법을 개정해야 한다.

문 대통령은 2011년 펴낸 『문재인의 운명』서문에서 도종환 시인의 ‘멀리 가는 물’ 시구를 인용했다. ‘흐린 것들을 흐리지 않게 만들어 데리고 가는 물을 보라. 결국 다시 맑아지며 먼 길을 가지 않는가.’ 내가 신세진 사람에게 자리를 챙겨주지 않겠다는 용기만 내면 된다. 멀리 가려면 잘못된 관행을 끊는 게 먼저다.

김종윤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