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 가이드라인 지켜야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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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고려대 수시모집 2학기 논술시험 문제 중 하나다. 고려대는 "단순 문제 풀이나 정답을 요구한 게 아닌 독창적 문제였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교육인적자원부가 구성한 논술심의위원회는 이 문제가 논술 지침(가이드라인)을 어겼다고 판정했다.

"수리(數理) 논술에는 풀이과정이나 정답을 요구하는 문제는 낼 수 없다고 지침을 내렸는데 어겼다"는 것이다. 고려대 김인묵 입학처장은 "이런 식으로 정부가 간섭하면 대학은 어떻게 우수한 학생을 뽑느냐"고 말했다.

교육부는 21일 지난해 수시모집 2학기 논술고사를 치른 24개 대학에 대한 심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중 고려대.서강대.울산대.이화여대.중앙대.한국외국어대 등 6곳이 가이드라인을 어겼다고 교육부는 밝혔다. 또 인하대.한성대.한양대.홍익대는 인성.적성 검사를 하면서 영어나 한자.수학 문제를 냈다고 지적했다. 해당 대학들은 "정부가 논술시험 문제는 물론 인성.적성 검사 내용까지 규제하고 이를 심사해 발표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할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 "너무 지나치다"=교육부 김화진 대학지원국장은 "고려대.서강대.울산대.이화여대.중앙대 등 5개대는 수리 논술, 외국어대는'외국어 제시문 금지'지침을 어겼다"고 말했다. 서강대는 '기후변화로 인한 댐의 호수 넓이 변화를 설명하라'는 문제였는데 논술이라기보다 특정 교과의 지식을 물었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에 대해 서강대 김영수 입학처장은 "가이드라인을 지키려고 고민하면서 출제한 문제인데 교육부와 대학의 견해차가 너무 큰 것 같다"며 고개를 저었다. 외국어대는 불어.일어.중국어 등 7개 외국어 특별전형 과정에서 국어로 제시문을 주고 지원 분야의 언어로 쓰라고 했다. 이는 교육부가 금지한 '외국어로 된 제시문의 번역이나 해석을 필요로 하는 문제'에 해당된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 대학 김종덕 교수는 "외국어를 잘하는 학생들을 뽑는데 해당 언어로 답안을 작성하지 않으면 어쩌란 말이냐"면서 "미술.음악 전공자를 그림이나 연주 솜씨를 보지 않고 뽑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교육부는 인성.적성 검사 결과를 점수화해 전형에 반영한 대학들도 문제 삼았다.

인하대는 청출어람(靑出於藍).괄목상대(刮目相對) 등의 사자성어 문제를 냈다가 지적받았다. 인하대는 "인문학 전공자는 기본적인 한자 실력이 필요해 테스트했는데 그게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고 반박했다. 한양대는 사지선다형의 영어 문제를 내고 이를 점수화했다고 지적됐다. 한양대 최재훈 입학처장은 "문제 유형을 세 번이나 바꿨는데 단순히 영어나 한자 등이 들어갔다고 해서 안 된다는 건 지나치다"고 주장했다.

◆ "그대로 간다"=서울대 김완진(경제학) 교수는 "수리 논술의 경우 대학 측은 고도의 사고력을 측정하기 위한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교육부는 정답과 풀이과정을 요구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럴 경우 판단은 대학에 맡겨야 한다"며 "고려대.이화여대의 문제는 깊이 있는 사고를 측정하는 데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교육부는 "학생 소양을 평가하는 인성.적성 검사가 학력 검사로 변질돼서는 안 된다고 판단해 점수화한 대학을 골라냈다"고 말했다. 당초 교육부는 규정을 어긴 대학들에 대해 강력한 제재를 하겠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구두 경고를 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선으로 마무리지었다. 이에 대해 "애초부터 교육부의 지침이 무리였다는 방증"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양영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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