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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엔 집을 조금만 키울래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서민아파트 5층 베란다 창을 넘어 오르간과 피아노와 플룻의 화음이 새해아침을 연다.
인천시 간석동 주공아파트 13동 403호 임현일씨(36·삼익악기 리드악기부 계장)집-.
가장인 임씨와 부인 신화심씨 (35), 딸 희주양(9·석천국교 2)·아들 주성군(6) 일가족이 오랜만에 눈과 귀와 마음을 한데 모아보는 즐거운 시간.
『저도 저희 집이 대한민국의 88년 현재 「평균 수준」이 아닌가 합니다. 특별히 잘사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못사는 것도 아니고 위를 보고 욕심을 내자면 한이 없고, 아래를 보고 위안을 삼자면 또 그렇고…옆을 보고 살면서 위로 올라가야겠죠.』
「평균시민」을 자처하는 임씨의 말.
경제기획원이 87년 전국 9백 57만 1천 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한국의 「평균 가정」은 가구주 연령이 36·32세, 가족수 4인, 주거면적 13·73평에 방이 2·3개, 가구주 월소득 41만 8천 4백원, 평균지출 41만 5천원으로 되어있다.
방 2개 짜리 13평 연탄보일러 아파트에 살면서 41만원 월급을 받는 4인 가족의 36세 가장 임씨는 그야말로 그 표본인 셈이다.
『현재 저의 생활에 대체로 만족합니다. 큰 욕심 없습니다. 낼 생각도 않고.
새해엔 애들이 점점 자라서 집이 비좁으니까 방이 하나 더 있는 18평 짜리 아파트로 집을 좀 키워갔으면 해요. 애들이 구김살 없이 자라주었으면 좋겠고. 제 직업인 악기제조 기술서적이 대부분 일본어로 되어있는데 그걸 마음대로 읽을 수 있게 일본어를 마스터했으면 좋겠고….』
「평균 시민」의 새해소망은 크지도 작지도 않게 수수했다.
69년 인천기계공고를 졸업한 임씨는 군복무를 마치고 75년 삼익악기에 입사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일을 돕던 부인 신씨를 79년 친척의 중매로 만나 6개월간의 교제 후 결혼했다. 『1백만원 짜리 전세방 1칸에 신접살림을 차렸지요. 그때 남편의 월급이 한달 18만원이었는데 8만원씩을 저축했지요. 보너스도 모두 적금을 들고 5년만에 4백 50만원을 마련하고 사채 3백을 보태어 7백 50만원에 이 집을 샀어요. 5차례나 셋집을 옮겨다니다 내집으로 이사하던 날은 너무 기뻐서 펑펑 울었어요.』
부인 신씨는 그때 「꿈의 궁전」만 같던 13평 짜리 아파트가 이제는 너무 비좁아 18평 짜리로 옮겨갈 생각으로 다시 저축을 시작, 빌은 돈을 갚고도 1백 50만원을 모았고 금년 말 1백만원짜리 재형저축을 타게 된다고 웃는다.
저축한 2백 50만원에 2백만원을 더 얻어 4백 50만원을 보태면 내년가을께 이사를 갈 수 있으리라는 설계다.
이렇게 알뜰한 설계에 임씨 집 가계는 늘 빠듯하다.
지난 11월 지출은 45만 5천원으로 적자였다. 「1년에 3∼4차례 중국음식점에서 자장면 한 그릇씩 먹는 것으로 외식을 때우고…」 「하루 연탄 4장으로 겨울을 나고…」 「2개월에 한번 미장원엘 갈까 말까…」하며 구두쇠작전을 펴도 가계부는 적자선상에서 줄타기를 한다. 연 5백% 보너스가 그래서 가계엔 그야말로 단비다.
형제 중 작은아들인 임씨는 그래도 같은 인천시내에서 형님이 모시고있는 어머니께 매월 1만 5천원 용돈은 거르지 않는다.
임씨의 한달 용돈은 3만원. 대부분은 교통비다. 부평의 직장까지 출퇴근하는데 2차례 버스를 갈아 타야하는 임씨는 『출퇴근 때마다 만원버스에서 시달리는 것이 큰 고역』이라고 했다.
그러나 자가용 구입은 아직 꿈같은 얘기.
임씨는 『올해는 제발 수도권의 대중교통난이 완화되었으면…』하는 바람도 갖고 있다.
입사 10년 만인 85년 기술계장으로 승진한 임씨의 업무는 오르간·멜로디언 등 관현악기의 소리를 내는 떨림판(Reed)을 개발하고 제작하는 일.
때문에 피아노 등 관현악기를 다루는 솜씨만은 「보통수준」 이상이다.
관현악기의 음의 높이를 결정하는 떨림판 제작은 두께 0·35∼0·45mm의 원판을 음의 높이에 따라 0·16mm까지 얇게 깎아내는 일부터 시작된다. 이는 1천분의 5까지 오차를 관리해야하는 정밀작업이다.
악기는 떨림판의 폭·길이·두께가 삼위일체가 이루어 졌을 때 비로소 정확한 소리를 낸다.
임씨는 가정의 평화도 사회의 안정도 바로 이 같은 「삼위일체」의 조화에 있다고 믿고 있다. 가정에선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녀들이, 정치에선 입법·사법·행정이 3위 일체의 균형을 이룰 때 우렁찬 하머니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임씨가 10년 동안의 직장생활을 통해 터득한 소중한 삶의 철학이다.
『새해엔 여야정당이나, 정부나, 국민이나 모두가 이렇게 「화음」으로 어울렸으면 좋겠어요.』
평균시민의 소박한 바람이었다. <김창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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