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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모르고 팝아트를 논하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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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동료의 집에서 파티를 즐기던 인기 그룹 멤버가 현장에 출동한 경찰에 약물 불법 소지 혐의로 붙잡힌다. 대중문화 스타가 우상으로 숭배받고 대중매체가 그 일거수 일투족을 보도하는 이 시대에는 단연 뜨거운 화젯감이다. 실은 반세기 전, 1967년의 영국에서도 그랬다. 스타는 롤링스톤스의 믹 재거. 혐의를 부인한 그의 법정공방과 함께 파티에 누가 있었고 어떤 차림이었는지 온갖 보도가 이어졌다. 경찰 호송차를 타고 법정에 갈 때는 한 기자가 카메라를 높이 들어 단독 사진을 찍었다. 플래시에 눈이 부셨는지 재거는 수갑 찬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린 모습이다. 수갑에 한데 묶인 사람은 런던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던 로버트 프레이저. 그 역시 같은 파티에서 붙잡힌 터였다.

팝아트의 아버지 리처드 해밀턴 #국립현대미술관, 아시아 첫 개인전 #신문·TV 대중매체 이미지 활용 #대량 소비사회의 풍경 낚아채

'Self-portrait 05.3.81 a'(1990).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Self-portrait 05.3.81 a'(1990).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신문에 실린 이들의 모습은 곧바로 새로운 시대의 현대미술을 통해 현대사회의 아이콘으로 거듭났다. ‘팝아트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 미술가 리처드 해밀턴(1922~2011)의 ‘스윈징(Swingeing) 런던’ 연작이 그것이다. 해밀턴은 자신의 아트 딜러였던 프레이저 사무실에 쌓인 신문 스크랩으로 콜라쥬를 만들고, 해당 사진에 담긴 모습을 골라 판화·유화의 다양한 기법으로 거듭 변주했다. 수갑만 금속 재료로 만들어 붙이거나 호송차 창문 밖으로 새로운 풍경을 그려 넣기도 했다. 제목의 ‘스윈징’은 호되게 야단치거나 매질한다는 뜻. 60년대 영국의 활기를 표현할 때 쓰던 ‘스윙잉 런던’을 비튼 것이다.

'Swingeing London 67 (f)' (1968~69)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Swingeing London 67 (f)' (1968~69)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리처드 해밀턴:연속적 강박’은 이를 포함, 50년대부터 현대사회라는 새로운 시대를 새로운 개념과 시각으로 해석한 그의 작품 90여 점을 선보이는 전시다. 아시아 첫 개인전인 동시에 여느 회고전과 사뭇 다른 구성이 두드러진다. 시대순으로 작품을 열거하는 대신 같은 이미지를 반복해 변주한 면면에 초점을 맞췄다. 객원 큐레이터를 맡은 제임스 링우드는 “모든 걸 보여주는 파노라마가 아니라 일정 작품을 클로즈업하는 전시”라고 말했다. 전시장에 자리한 해밀턴의 작품은 앤디 워홀이나 로이 리히텐슈타인 같은 미국 팝아트와 다른 맛, 미국에 앞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비주의 사회를 기존 회화와 다른 방식으로 포착하기 시작한 영국 팝아트의 전통, 당대 예술가에게 매혹과 비판적 접근을 고루 자극했던 현대사회의 특징 등 다양한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그린 해밀턴 초상화와 여러 자화상을 논외로 하면 전시작은 크게 6가지로 나뉜다. 50년대말 시작한 ‘그녀(영어 제목 $he)’연작은 가전광고에 담긴 욕망과 여성의 이미지를, 60년대와 2000년대에 걸친 ‘토스터’는 소비사회에서 대량생산된 가전제품의 매끈한 디자인을 변주했다. 80년대 ‘시민’은 옥중 투쟁을 벌이는 정치범 이미지를 마치 종교화의 순교자처럼 묘사한 점이 흥미롭다.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까지 벌였던 IRA(아일랜드공화국군) 소속 수감자들이 규율에 저항, 교도소에서 몸도 씻지 않고 ‘불결 투쟁’을 벌인 모습을 해밀턴이 TV다큐에서 본 것이 계기였다.

'Toaster'(1966~67)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Toaster'(1966~67)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해밀턴은 이처럼 신문·잡지·TV 등 대중매체에 실린 이미지나 새로운 미디어를 곧잘 활용했다. 90년대 ‘일곱 개의 방’은 부분부분 촬영한 이미지를 컴퓨터로 스캔하고 저장해 디지털로 결합했다.

'The citizen'(1981~83).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The citizen'(1981~83).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객원 큐레이터 링우드는 해밀턴을 “현대생활을 그리는 화가이자 컨셉트 아티스트, 그 자신이 장난스럽게 표현하기로는 ‘구식 예술가’, 굉장히 새로운 것을 갈구하는 실험가이자 새로운 미디어에 호기심 많았던 사람”이라며 그의 작품을 “현대의 역사화나 종교화라 할 수도 있다”고 전했다. 개막에 맞춰 내한한 해밀턴 부인 리타 도나는 6년 전 별세한 남편에 대해 “평생 부정적 평가를 많이 받아 특정 의견에 개의치 않았지만 이번 전시의 구체적 아이디어를 봤다면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작은 해밀턴 재단과 영국 테이트 미술관,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같은 기관은 물론 데미안 허스트 같은 유명 미술가 개인 소장품도 빌려왔다. 믹 재거도 자신이 등장한 ‘스윈징 런던’ 중 한 점을 소장하고 있는데 롤링스톤스 관련 전시 때문에 이번 대여 요청에는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내년 1월 21일까지.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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