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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80년 서울의 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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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80년 서울의 봄을 지배한 일반행동원칙은 자율화였다.
당연한 귀결로 자율화의 몸부림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구석구석에 역력했고 특히 권력의 심한 규제를 받아온 대학가와 노동계에서 두드러졌다.
80년 4월21일 발생한 소위 사북사태로 우리 기억에 생생한 80년 봄의 노동운동은 임금인상 등을 둘러싼 노사분규와 노조민주화 운동의 두 갈래로 진행됐다.
80년 들어 4월까지 발생한 집단노사분규는 모두 7백20여건이다. 이는 79년 같은 기간의 7배(1백5건)에 이르는 숫자다.
이 엄청난 양적 팽창은 그후 「민주화회의논자」들에게 하나의 구실도 됐다.
그러나 발생원인을 보면 당시의 노사분규는 그럴만한 점이 있었다.
80년의 경제침체라는 요인 때문인지 노사분규의 75%인 5백30여건이 체불임금 지급요구에서 비롯했다. 그밖에 임금인상 요구가 26건, 휴·폐업 반대가 25건, 노조관계가 33건 등이었다.
유형별로는 작업거부가 19건, 농성상태로 번진 것이 19건, 시위 9건, 그밖에 집단진정이나 간단한 항의가 6백70여건으로 전반적으로는 그리 심각한 양상은 아니었다. 사북사태 이후 점거·단식농성 등 「과격행위」가 늘어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과격이라 해봐야 그때까지 박정권의 억압상황 속에서 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실제 이상의 험한 모습으로 비쳤다고도 볼 수 있다.

<체불임금 요구가 75%>
이들 분규의 해결은 5백10여건이 노동청이나 시·도에 조정을 신청, 행정당국의 조정전 2백40여건이 노사간 합의를 봤고 노동조정위원회에 의해 합의·조정된 게 69건, 직권조정이·4건 등이며 10여건은 조정신청이 취소됐다.
국내 고무신발류의 80%를 생산하는 부산 신발류업계의 상황은 불황으로 인한 당시의 노사관계를 잘보여 준다.
6만여 종업원이 일하는 부산신발류 업계에서는 한때 하루5천∼6천 여명이나 떼지어 이 공장에서 저 공장으로 옮기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그 즈음에는 하루 평균 1백50여명으로 이동인원이 격감됐다.
이 같은 현상은 신발류의 수출부진과 원자재 값 상승 등으로 업체가 경영난을 겪게되자 오히려 노조가나서 대규모 이동이 계속되면 경영이 어렵게 된다고 이동중단을 호소한 결과였다.
오일쇼크 등으로 인한 세계경제 침체에다 다년간 급성장을 해 온데서 파생된 부작용이 경쳐 당시 우리경제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러한 현실은 최규하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1월18일)의 경제부문에서도 잘 나타난다.
『솔직이 말하여 정부의 힘만으로는 이 과제들을 해결해 나가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정부를 신뢰하고 정부시책을 이해 협조해 주어야만 되겠다. 안정기반 유지는 경제난국 타개와 정치발전을 위한 불가결의 전제조건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이 기회에 최근 우리사화에서 정치과열상태가 조성되어 나가는데 대하여 우려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점 국민여러분의 자제있기를 당부한다….
외채부담은 급격히 늘어가는 반면 수출은 해외시장 여건의 악화, 물가고, 임금상승 등으로 국제경쟁력이 약화돼 과거와 같은 신장은 어려워졌다. 국제 적자폭은 계속 확대되는 데다 경제성장률은 제로 내지 마이너스를 기록하게 될것으로 예상된다. 경제가 고도성장에서 갑자기 침체될 경우 많은 근로자들이 일터를 잃게된다.
노사문제와 관련해서도 최대통령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공공성을 인식, 고용안정과 근로자 복지향상에 노력을 경주해야하며 근로자는 자기직장이 성장해야 잘 살수 있고…』라는 원칙론을 내세우고 노조를 합리적으로 조직하여 운영함으로써 진정한 근로자의 대변기관으로 육성시킬 것이며 산업장별 노사협의회운영도 내실화하여 노사문제가 자율적으로 해결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80년 봄을 겪고 오늘날 놀라운 세력으로 등장한 노동계의 면모를 알기 위해 10·26이전의 노동운동을 일별해 보자.
유신정권에 치명타를 가한 YH사건은 십 수년간 눌려온 근로자의분노가 터진 상징적 사건이다.
그 이전도 별반 나을게 없었지만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 75년 이후의 노동운동은 다른 반체제·민주화운동과 더불어 철저히 봉쇄 당했다.
근로자의 총체라 할 한국노총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내세워 현실에 안주했다.
매년 초 임금인상 건의안이나 발표하고 이따금씩 정부시책·행사를 지지·옹호하는 성명이나 내는 게 고작이었다.

<민주운동 주제로 부각>
「어용」이니 「노동귀족」이니 하는 비판의 소리가 높았지만 귓등으로 넘겼다.
그런 상황에서 한동안 침묵속에 움츠리고 있던 「대학생·종교계와 연계된 노동운동」이 77년 이후부터 근로자와 농민의 문제를 정치적인 집단행동으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76년 말의 함평 고구마사건을 비롯, 77년2월의 방림방적사건, 4월의 인선사 유령노조사건, 6월의 남영나일론 부당해고사건, 9월의 평화시장사건, 78년2월의 동일방직오물사건 등이 그런 것들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긴급조치 9호로 한계점에 이른 대학생·종교인 등 지식인 중심의 민주화운동에 새로운 동기·좌표를 부여한 것이 노동자·농민운동이기도 했다.
반체제 운동을 전개해온 많은 이들이 1977년을 기점으로 노동자· 농민의 문제가 민주화운동의 핵심이슈로 등장, 운동에 전기를 제공했다고 평가하고있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은 당시의 민주화운동을 정리하면서 『운동세력이 양적으로는 축소됐으나 질적인 심화를 경험하며 운동기반은 굳어졌다.…노동문제가 현장의 범위를 넘어 정치·사회문제화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국가보위법 등으로 노동자들의 집단의사 표시가 불법화되어있고 또 노동조합 대부분이 어용화되어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노동자·농민은 교회 및 기타 운동단체에 호소하여 정치문제화 시키는 길을 택했다. 동일 방직사건 등은 지식인을 중심으로 해온 민주화 운동세력이 민중문제에 구체적으로 감여하는 계기를 형성하면서 연합운동의 활성화에 기여했다. 77년 이후의 민주화 인권운동은 이 같은 현장문제의 체기라는 원동력에 의해 추진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하고있다.
이처럼 노동·농민운동은 민주화운동의 주역으로 성장해온 뿌리깊은 저력을 함축하고 있었다. 때문에 10·26으로 전기를 맞은 노동·농민운동은 고양되는 자율화 분위기속에 분주한 세월을 맞았다.
우선 노조구성·개편·기존노조의 개혁이 첫 과제로 제기됐다.
79년10월 섬유노조위원장으로서 노총위원장이 됐던 김영태씨는 동일방직 여공들이 산업선교회와 관련이 있다며 다른 회사에 취업을 못하도록 공문을 발송한 적이 있다.
동일방직 해고여공들은 그가 『동일 방직 여공들은 외부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으며 분뇨와 독침을 휴대하고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악질』이라고 했다면서 명예훼손으로 고발했다.
그는 여관방에서 현금 1천5백 만원을 도난 당한 것 등 때문에 물의가 일자 그 자리를 물러났다.
전국섬유노조 정상화추진위는 분실한 돈이 기업체들로부터 받은 것이며 그 중에는 노사분규가 계속되던 국제상사로부터 받은 2백 만원이 포함돼 있다고 법무부에 진정을 내기도 했다. 사실은 여하간에 당시 노조간부의 행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노동계가 노조재편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을 때 당국도 『근로자 단체교섭권의 단계적 부활을 검토 중』이라고 밝히는 등 다소의 능동적 모습을 보였다.
3월10일 35회 노동절 기념식에서 정한 주노총위원장 대리는 △정부당국과 사용자의 저임금 고정화시책 배격 △노동기본권 완전회복 △단체교섭의 산업별 대단위 교섭체계로의 전환 △노조의 정치활동 영역확보 등을 역설하면서 『이 같은 요구의 관철을 위해서는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의 강력한 전개가 필요하다』는 등 전례 없는 높은 톤의 기념사를 낭독했다.
79년에 비해 노사분규가 7배나 대폭 늘었지만 대부분은 조정전 합의·합의조정 등으로 별탈없이 지나갔다. 그러던 중 4월7일 연합노조 청계피복노조원 1백60여 명이 임금인상·상여금 지급·퇴직금 제도실시 등을 내걸고 농성에 돌입했다.
평화시장 옥상의 노조지부 사무실에서 철야농성을 시작한 이들은 결의문을 통해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며 업주가 불황을 이유로 생존급의 임금지불을 묵살하는 처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때는 이미 20여 개 대학에서 점거농성·시위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정부는 평화시강의 노사분규가 대폭발의 위험을 안고있는 노동계전반에 확산될 것을 우려했다. 업주들에게 적극적인 타협에 나서도록 종용하는 한편 기동경찰을 배치해 근로자들의 이동을 차단했다.

<전경련 등 대응책 부심>
이 분규는 노동청의 개임으로 시작 11일만에 극적인 타결을 보았다. 그러나 이미 그 즈음에는 진해화학·전국금융노조 등에도 분규가 번져가고 있었다.
또 마산수출자유지역의 일본업체 북능에 노조가 결성되자 일본인업주가 휴업으로 맞서는 등의 분규도 있었다.
기업에 대한 심한 비판과 함께 노사분규가 잇달자 이에 자극된 전경련을 중심한 재계인사들도 모임을 갖고 「정·경·사회문제 특별대책위」를 구성, 「자유경제체제에 대한 사회의 도전」에 대처하기로 하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이에 신현확총리는 『기업들이 사회의 비판여론에 과잉방어를 하는 것 같다』며 『경제인들은 국가시책, 근로자들의 요구 등과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기업의 입장을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총리의 이 같은 발언이 있은 다음날인 4월17일 민영탄광 회사들과 노조는 그해 임금인상률을 회사별로 20∼26·5%선으로 할것에 합의했다.
그해 2월 한 달간 물가가 14·9%오른 상황에 비하면 기대 충족과는 거리가 덜었다.
불황으로 동양최대라는 동명목재가 조업을 전면중단하고 대한조선공사가 수주감소를 이유로 종업원을 집단 대기시키고 고려원양이 종업원 2천7백 명의 노임을 체불하는 등 대기업들마저 휘청거리는 판국이라 민영탄광광원들도 그런대로 넘어가는 듯 싶었다.
그렇지만 이 임금인상안은 어용노조 시비로 불만에 가득 차있던 동원탄좌 소속 광원들을 촉발시켰다. 바로 서울의 봄을 뒤흔든 사북사태다.
80년4월21일 발생한 사북사태는 이날 상오까지만 해도 대단치 않았다. 광원 5백 여명이 회사광장 앞에 모여 파벌다툼의 어용노조를 몰아내자는 웅성임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웅성 임이 경찰에는 광원집단농성으로 확대보고 돼 광원들은 뜻밖의 경찰진압에 맞닥뜨려졌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번져 3천 여명으로 늘어난 광원들이 철길을 사이에 두고 정찰과 대치, 벌어진 투석전으로 마침내 사태를 악화시켰다.
이때가 하오3시쯤, 수에 밀린 경찰이 쫓기자 흥분한 광원들이 닥치는 대로 경찰을 구타했고 파출소를 점거하기에 이르렀다.
3천여 광원들은 길목마다 갱목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인구 2만5천 여명의 사북 탄광촌을 완전 장악, 폭력사태가 벌어지는 속에 경관1명이 숨지고 광원 등 46명이 중경상을 입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광원천하의 사북상가는 탈취와 방화로 얼룩졌고 특히 사태 이틀째 흥분한 광원들과 광원부인들이「어용노조」를 외치며 노조지부장 부인을 끌어내 손을 묶고 시내를 질질 끌고 다녔다. 성이 안찬 과격파들이 사택 한복판에 나무기둥을 세워 지부장 부인을 동여 매놓고 밤새도록 린치하는 충격적인 사건까지 벌어졌다.
저임금에 대한 불만과 어용노조시비, 여기에 오랫동안 노조활동이 자율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싹튼 노조내의 파벌다툼과 불신 등이 한꺼번에 폭발한 이 사태는 무성의한 광주, 누르려고만 하는 경찰의 고압적 자세 등이 뒤얽혀 최악의 상태에 이르게 한 표본이었다.
4일 동안 무법천지가 됐던 사북읍은 광원과 회사측대표가 노조위원장 사퇴, 임금인상률 조정 등에 합의함으로써 가까스로 정상을 회복했다.
사북사태 이후 노사분규는 급격히 확산됐고 진정·작업거부 등 비교적 온건한 방법으로 진행되던 것이 직접행동으로 바뀌면서 시위·농성·점거의 형태가 두드러졌다. 물론 87년 노사분규 현상에는 미치지 못하는 정도였지만 소소한 시위·농성도 당시에는 「과격」으로 비쳤다.
분규는 25일께는 일신제강·인천제철· 국제실업·동양나일론 등 주요업체만도 20여 개에 이르렀으며 보고되지 않은 영세업체까지 감안하면 상당수가 됐다. 또 이들의 분규쟁점이 어용노조지부장 퇴진 등으로서 이러한 요구가 각 회사 사정으로 쉽게 수락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경직된 당국이 쉽게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4월29일 발생한 부산 동국제강 분규 때는 농성공원 1천명과 경찰이 직접 충돌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정부, 정치활동에 쐐기>
회사기물을 부수고 불을 지르던 공원들은 최루탄을 쏘며 진압에 나선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 됐는데 12명의 중경상자를, 낸 이 분규사태도 당시로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한편 노조에 대한 근로자들의 질타가 계속되는 가운데 노총은 『그 동안 노동조합은 각종제약으로 인해 제구실을 못하면서 이로 인해 어용노조로 전락했다』며 『근로자들을 위해 노력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을 적극 지원함으로써 근로자의 권익을 도모하겠다』고 나섰다.
이는 「노조가 공직선거에서 특정정당을 지지하거나 특정인을 당선시키기 위한 행위를 할 수 없다」는 노동조항법 규정을 위배하면서 사실상 정치활동을 선언한 것이었다.
물론 노동청은 즉각 노조원 개인은 무방하지만 노조의 정치활동은 허용할 수 없다고 쐐기를 박고 나섰다.
사북사태 등 일련의 노사분규와 학원소요가 계속되자 최대통령은 30일 『폭력의 난무는 단호히 다스려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계엄사령부도 30일 육본에서 긴급 계엄사전군지휘관회의를 열고 노동·학원문제 및 정치인들의 학원내 정치집회 등을 논의한 뒤 「이 같은 사태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앞으로 이러한 혼란상태를 방치한다면 이는 안정과 질서를 바라는 대다수 국민들의 여망을 등지는 것이므로 국가안보적 차원에서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을 결의했다.
그간 「일부 사회혼란행위」를 일시적인 진통으로 간주하여 왔으나 불법적 행동이 계속되면 국가민족의 생존권을 보위해야 할 계엄군으로서 「필요신 조치를 취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80년 서울의 봄은 벌써 저무는 기색이 완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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