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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똑똑한 우리 딸, 내가 나온 대학 못 간다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무관심 아빠'(무빠)들은 자기 자녀에 대해 '공부 잘하고 똑똑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자녀가 아빠의 기대치보다 낮은 대학에 지원하는 것을 보고서 깜짝 놀라는 경우가 있다. 전문가들은 "아빠들은 대학 정원 축소, 달라진 대학의 위상 등 입시 환경 변화를 고려하지 못하고 자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고 말한다. 일러스트 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무관심 아빠'(무빠)들은 자기 자녀에 대해 '공부 잘하고 똑똑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자녀가 아빠의 기대치보다 낮은 대학에 지원하는 것을 보고서 깜짝 놀라는 경우가 있다. 전문가들은 "아빠들은 대학 정원 축소, 달라진 대학의 위상 등 입시 환경 변화를 고려하지 못하고 자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고 말한다. 일러스트 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무빠' 대입 설명서③]

대한민국의 평범한 아버지이자 한 중소 제조업체 부장인 김모(51)씨.
고3 딸이 좋아하는 티라미수를 사다 주며 딸과 대학 입시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해보려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할 뿐입니다. 한 지붕 아래 사는 가족끼리 이토록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니. 김 부장은 마음은 갑갑하기만 합니다.
그래도 아내와 딸에게 서운하기보다는 미안하고 면목 없을 때가 더 많습니다. 사실 김 부장의 ‘입시 까막눈’ 때문에 딸이 눈물을 보인 적도 있거든요.

교육에 무관심한 아빠 위한 대입 가이드 #이전보다 대학 정원 반토막, 경쟁률 치솟아 #서울대·고려대·연세대 일컫던 'SKY 대학' #요즘은 '서울·경기·인천 소재 대학' 뜻해 #"노력하는 네 모습 자랑스럽다" 격려해야

무슨 일이 있었냐고요?
그러니까 그때가 아마 9월 초였을 거예요. 아내가 딸의 대입 원서 쓰는 걸 돕는다며 딸 방에 콕 박혀 도통 나오질 않더군요. 김 부장은 ‘벌써?’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능(대학수학능력시험, 올해는 11월 16일)까지 두 달도 더 남았는데 벌써 원서를 쓴다니…. 게다가 무려 여섯 군데에 지원한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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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고사 세대인 김 부장도 물론 대입 원서라는 걸 썼죠. 하지만 전기·후기·전문대 이렇게 딱 세 번의 기회가 전부였습니다. 말하나 마나 ‘전기’로 쓴 대학에 합격하는 게 최상의 결과였고요.

김 부장은 ‘여섯 번의 기회라니. 세상이 좋아졌구나!’싶었습니다.

딸이 대체 어느 대학에 지원하나 궁금한 마음이 뭉게구름처럼 커졌습니다. 김 부장이 자랑을 안 해서 그렇지, 사실 딸은 공부를 꽤 잘합니다. 이제껏 반장도 여러 차례하고 전교 10위권 밖으로 밀려난 적도 없으니….
궁금증과 기대감에 부풀어 은근슬쩍 딸의 방문을 열고 들어간 김 부장. 아내와 딸은 ‘어느 대학 무슨 과에 어떤 전형으로 지원할 것인가’를 두고 한창 설전을 벌이는 중이었어요. 대화를 듣던 김 부장의 표정이 굳어집니다.

“아니, □□대·◇◇대에 지원한다고? 거긴 원래 후기 아냐?”

김 부장도 모르게 큰 목소리가 튀어나왔습니다. 아내와 딸은 놀란 토끼눈으로 그를 돌아봅니다. 내친 김에 한 마디 더 했죠. “너는 반장도 하고, 공부도 잘하는데 거기밖에 못 쓰냐?”

갑자기 딸의 귀가 빨갛게 물이 듭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나도 아빠가 졸업한 대학 가고 싶은데, 그게 맘대로 안된다”고 간신히 답하곤 그대로 책상 위에 풀썩 엎드려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그때부터였어요. 김 부장이 딸의 방에 들어가 말이라도 붙일라치면 아내가 번개처럼 다가와 “얼른 (나와요)!”이라며 눈에 힘을 주기 시작한 게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서럽게 울렸으니, 김 부장에게도 그날의 기억이 아프게 남아있습니다. 아내가 출동하면 군말없이 딸의 방에서 터덜터덜 빠져 나옵니다.

하지만요. 그날 김 부장은 딸에게 실망했다거나 딸을 혼내려는 마음이 ‘1도’ 없었어요. 양말처럼 뒤집을 수만 있다면 김 부장은 당장이라도 마음속을 꺼내 보여주고 싶습니다. 아마 그날의 김 부장 마음을 양말처럼 뒤집어 탈탈 털어본다면 이거 하나가 툭 떨어질 겁니다. 바로 이 ‘궁금증’이요.

“나보다 공부도 훨씬 잘하고 똑똑한 우리딸, 왜 내가 나온 대학에 못 가는 거죠?”

③ “똑똑한 우리 딸, ◯◯대는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간 자녀 교육엔 관심을 두지 않아 ‘입시 까막눈’이라 놀림도 받던 김 부장, 알고 보니 ‘SKY’ 출신이더군요. 김 부장이 자녀의 입시에 유독 어두운 건, 그간의 ‘무관심’에 자신의 ‘고(高) 스펙’이 더해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런 고스펙 학부모의 경우, 자신이 경험한 대입 과정이 자녀가 처한 입시 환경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 경우가 꽤 많은데요. 그래서 무심코 자신의 학창시절 경험담을 툭 던져 자녀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김 부장이 “그 대학은 우리 때 후기에 모집하던 곳이다”고 말해 딸을 울린 게 대표적인 예죠.

이뿐 아닙니다. 몇몇 학부모는 학교 교사나 입시업체 컨설턴트에게 대학을 추천받고서 자신의 눈높이에 맞지 않으면 “우리 애가 ○○대학에 갈 수준밖에 안되냐”며 언성을 높이기도 하죠. 결국 교사 앞에서 아이는 울고, 부모는 화를 내는 상황도 자주 벌어집니다.

이런 수많은 ‘김 부장’이 명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간 입시 환경은 상전벽해(桑田碧海·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함) 수준으로 달라졌단 사실입니다. 일단 김 부장께서 대학에 가던 시절과는 대학 정원부터 다릅니다. 무려 절반이 줄었습니다.

학령인구가 줄었으니, 대학 정원도 줄어드는 게 당연하긴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유독 상위권 대학으로 쏠림 현상이 심한 편이지요. 게다가 수시모집 지원 기회는 여섯 번으로 늘어났고요. 그러니 일부 상위권 대학은 학과를 불문하고 ‘김 부장’ 시대보다 경쟁률이 몇 배 높아진 겁니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대학 문이 훨씬 좁아진 셈이죠.

‘아빠가 다닌 대학보다 낮은 수준의 대학’이라는 것도 김 부장이 대학에 가던 시절을 기준으로 대학의 서열을 매긴 것일 테지요. 그런데 지금은 대학의 순위도 많이 달라졌답니다. 김 부장이 대학 갈 때는 오직 '학력고사 점수'가 유일한 전형요소였잖아요. 그러니 당시에는 학력고사 점수 0.1점 차이로도 대학의 서열이 확연히 갈렸지만, 지금은 입시 전형이 워낙 다양해 획일화된 잣대가 없어진 셈이죠. 이전처럼 대학의 서열을 일률적으로 판단하기 힘들어진 겁니다.

줄어든 대학 정원, 완화된 대학 서열 등으로 인해 의미가 달라진 단어도 있어요. 바로 김 부장이 졸업한 대학이 포함된 ‘SKY’란 단어인데요. 원래는 서울대·고려대·연세대 3곳의 머릿글자를 조합한 신조어였죠. 지금은 ‘서울·경기·인천’의 준말로도 통용됩니다. 이전에는 서울대·고려대·연세대에 들어가야 '성공적'이라 평가했는데, 지금은 수도권 지역 대학에 진학했다면 '선방했다'고 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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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부장님!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딸이 김 부장님 기대치에 다소 못 미친 대학에 지원한 이유를 아셨는지요. 사실 딸이 지원한 대학은 이미 사회적 평판과 위상이 김 부장의 생각보다 훨씬 높아졌을 겁니다.

미안하고 면목 없다며 딸 앞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이렇게 얘기해보면 어떨까요. “딸, 미안해. 아빠가 몰라서 그랬던 거야. 힘든 환경에서 노력하는 네 모습이 자랑스럽다”고요.

▶도움말: 신동원 휘문고 교장, 김혜남 문일고 진학부장, 이만기 유웨이중앙교육 평가이사, 남윤곤 메가스터디 입시전략연구소장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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