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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폐 청산, 국감 파행 … 한국정치는 촛불에 답하지 못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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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촛불집회 1주년을 이틀 앞둔 27일 오후 서울 종로 거리에 지난해 10월 29일 첫 번째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겹쳐 놓았다. 이날 시작 된 촛불집회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까지 총 23차례 이어졌다. 28일 촛불집회 1주년 기념행사는 서울 광화문광장과 여의도 두 곳에서 열린다. [김경록 기자]

촛불집회 1주년을 이틀 앞둔 27일 오후 서울 종로 거리에 지난해 10월 29일 첫 번째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겹쳐 놓았다. 이날 시작 된 촛불집회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까지 총 23차례 이어졌다. 28일 촛불집회 1주년 기념행사는 서울 광화문광장과 여의도 두 곳에서 열린다. [김경록 기자]

23번의 집회에서 1700만 개의 촛불(주최 측 추산)이 거리를 밝혔다. 2016년 10월 29일 첫 집회에서 청와대 앞 1.3㎞까지 행진했던 시민들의 행렬은 집회를 거듭하면서 청와대와의 거리를 900m, 500m로 좁힌 끝에 청와대 앞 100m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대통령 탄핵안 국회 통과(지난해 12월 9일)와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지난 3월 10일), 최초의 봄철 대선(5월 9일)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1년 전 청와대에서 성난 함성을 듣던 대통령은 ‘영어(囹圄)의 몸’이 됐고, 촛불집회에 나섰던 야당 정치인들은 대통령, 정당 대표가 됐다. 그러나 촛불은 여전히 미완성이란 평가다.

촛불·대선 정치권 주역들의 오늘 #문 대통령, 적폐청산으로 갈등 불러 #홍준표, 당 대표 돼 여당과 대치 중 #안철수·유승민도 지방선거에 고심 #“협치 안 보여주면 촛불 또 켜질 것”

이정희 한국외대 정치학과 교수는 “촛불혁명에서 정치와 이념이 다른 시민들이 모순을 바꿔달라고 한목소리로 요구한 직접 민주주의의 요체가 바로 협치(協治)였다”며 “그러나 이를 제도화해야 할 정치권은 촛불의 의미를 정치에 활용했을 뿐 진정한 의미의 협치를 구현하려는 노력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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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촛불 정국에서는 협치가 있었다.

당시 여론지지율 선두주자였던 문재인 대통령은 처음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조기대선에 반대했다.

그는 대통령 2선 후퇴 후 ‘거국중립내각’을 구성해 대통령 파면을 막자고 주장했다. 그러다 지난해 11월 12일 처음으로 100만 명이 운집한 집회에서 “대통령은 이미 국민의 마음속에서 탄핵당했다”며 해법을 수정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문 대통령은 탄핵이 아닌 자진 하야를 요구했다. 이른바 ‘질서 있는 퇴진론’에 동의한 것이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문 대통령과 달리 질서 있는 퇴진론을 먼저 꺼냈고, 요구를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민심은 이미 질서 있는 퇴진이 아닌 ‘즉각 퇴진’에 가 있었다. 박 전 대통령은 노무현 청와대 출신인 김병준 전 정책수석을 총리로 지명하면서 2선 후퇴 카드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나 그 정도로 가라앉을 상황이 아니었다.

왼쪽부터 문재인, 홍준표, 안철수, 유승민.

왼쪽부터 문재인, 홍준표, 안철수, 유승민.

박 전 대통령과 정치권이 질서 있는 퇴진 일정을 마련하지 못하자 탄핵 요구는 더 거세졌고, 문 대통령이나 안 대표도 나중에 탄핵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결정적으로 박 전 대통령 탄핵을 가능하게 한 건 당시 여당이던 현 바른정당의 김무성·유승민 의원이었다는 얘기가 정치권에선 정설이다.

의석이 부족했던 야권이 탄핵안 국회 상정을 일주일(12월 2일→9일) 미루자 12월 3일 6차 촛불집회에는 사상 최대 규모인 232만 명(주최 측 추산)이 모였다. 이 상황에서 김무성·유승민 의원이 영향력을 행사하던 비박 모임 ‘비상시국회의’가 촛불집회 바로 다음 날인 12월 4일 탄핵 찬성 쪽으로 사실상 입장을 정리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안은 국회에서 가결됐을 때 찬성이 234표(재적 299명)였다. 당시 야권 전체 의석이 171석이었으니 새누리당(자유한국당 전신)에서 최소 63명의 이탈이 있었다는 뜻이다. 탄핵을 거치며 새누리당은 분열했다. 김무성·유승민 의원은 ‘개혁보수’를 기치로 탈당해 바른정당을 창당했다. 그 자리를 홍준표 현 자유한국당 대표가 채웠다.

하지만 정치가 시민의 협치 요구에 응답한 건 여기까지였다.

곧 문재인-홍준표-안철수-유승민-심상정 대선후보의 대결이 펼쳐졌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학과 교수는 “탄핵 직후 조기대선을 거치면서 촛불이 요구한 혁신 대상이 뭔지에 대해 정치권은 진실한 토론이나 공감대를 형성하는 기회를 갖지 않았다”며 “촛불이 보여줬던 광장의 협치는 정파의 이해에 따라 정치권에서는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촛불의 요구는 ‘정치교체’였는데, 현실은 정권교체에만 머물러버렸다”고 덧붙였다.

문 대통령 당선 이후 그의 대선 경쟁자들이 다시 속속 정치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홍 대표가 7월 3일 가장 먼저 제1야당 대표가 됐고, 안철수 대표도 8·27 전당대회에서 당선되며 조기 복귀했다. 유승민 의원은 다음달 13일 바른정당 전당대회에서 대표 선출이 유력하다. 김무성 의원은 보수야권 재편을 내세우며 물밑에서 한국당과의 통합을 추진하고 있다.

정치권 협치의 운명이 결국 탄핵 및 조기대선의 주역이었던 이들에게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현재로선 협치의 앞날이 밝진 못하다. 문 대통령과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적폐청산’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이에 반발하는 야당과 대치가 거칠어지고 있다. 촛불의 의미를 되새겨야 했던 정치권의 계산기는 이미 내년 6월 지방선거 일정에 맞춰진 상태다.

박명호 교수는 “시민들이 광장에서 원했던 근본적 변화에 대한 요구에 정치권이 답하지 못한다면 광장의 요구는 언제라도 다시 불이 붙을 수 있다”고 말했다.

강태화·허진 기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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