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해석 바꿔 주당 52시간 근로 땐 “기업부담 12조 증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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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근로시간 단축 문제가 다시 쟁점으로 떠올랐다. 문재인 대통령이 16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가 어렵다고 판단될 경우 행정해석을 바로잡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의 행정해석을 폐기해서라도 근로시간을 줄이겠다는 얘기다. 현행 행정해석은 주당 최대 근로시간을 68시간으로 본다. 주 40시간에 12시간의 연장근로와 휴일(토·일)근로를 합쳐서다. 문 대통령의 발언 취지는 휴일근로를 제외해 주당 최대 52시간으로 수정하겠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 근로시간 단축방안 문제점 #현재 최대 68시간서 16시간 줄어 #기업 대비할 시간 없이 당장 적용 #돈도 문제지만 범법자 전락 위기 #일부 근로자는 임금 줄어들 수도 #“편의적 방안 대신 사회적 합의를”

근로시간 측정기준과 해석변화

근로시간 측정기준과 해석변화

행정해석을 “바로잡겠다”는 문 대통령의 말은 틀린 게 아니다. 고용부가 수십 년간 잘못된 행정해석을 해 왔기 때문이다. 1997년 근로기준법을 전면 개정할 때부터다. 당시 근로시간을 측정하는 기준이 하루 단위(8시간)에서 일주일(44시간)로 바뀌었다. 법 개정 전에는 하루 8시간을 넘을 경우에만 연장근로로 인정됐다. 따라서 휴일근로도 8시간까지는 휴일근로수당만 주면 됐다. 8시간을 초과할 때만 휴일근로수당과 연장근로수당을 중복해 지급했다. 그러나 97년 개정 이후에는 한 주에 일한 시간이 44시간을 초과하면 연장근로로 간주했다. 휴일에 일하면 휴일근로이면서 연장근로가 되는 셈이다. 따라서 휴일근로수당과 연장근로수당을 중복으로 할증해 지급해야 한다.

그런데 당시 정부는 이렇게 보지 않았다. 근로시간 측정 기준이 바뀌었는데도 행정해석은 예전의 일일 근로시간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래서 휴일에 일해도 8시간을 넘을 때만 중복할증을 인정했다. 2004년 주5일 근무제를 도입할 때도 이 해석을 바꾸지 않았다.

기업은 정부의 행정해석을 따랐다. 그러다 2010년 경기도 성남시와 안양시의 퇴직한 환경미화원이 소송을 제기하면서 문제점이 수면 위로 부상했다. 이후 비슷한 소송이 잇따랐다. 현재 이들 소송은 대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하급심에선 14건의 소송 가운데 11건이 ‘주당 최대 근로시간은 52시간’이라고 판단했다. 휴일에 일했다면 휴일근로수당과 연장근로수당을 중복해 주라는 취지다.

이 때문에 근로기준법을 개정해 근로시간을 둘러싼 논란을 정리할 필요성이 대두됐다. 여야 모두 52시간으로 줄여 법에 명시하는 데는 공감한다. 다만 기업에 가해질 충격을 덜기 위해 규모별로 일정 기간의 유예기간을 주는 문제를 놓고 여야 간에 의견차를 보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행정해석을 폐기하면 유예기간 논란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곧장 전면 시행되기 때문이다. 기업으로선 준비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 막대한 비용 부담도 떠안아야 한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부담은 12조3000억원에 달한다. 300인 미만 중소기업 부담분이 8조7000억원에 이른다. 만일 추가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기업들이 휴일·연장 근무를 없애면 특근·야근 등으로 주머니를 불려 왔던 근로자도 소득이 확 줄게 된다.

더욱이 국내 대부분 기업은 범법자로 전락한다. 법률은 소급적용이 안 되지만 행정해석은 소급적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주당 최대 68시간을 적용한 기업은 모두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셈이 된다. 물론 일시적·간헐적으로 68시간을 적용했다면 약식기소 정도로 끝나겠지만 대부분 기업이 오랫동안 근로시간 규정을 어겼기 때문에 정식 기소를 피할 수 없다.

자칫하면 국가 배상론으로 번질 수 있다. 정부의 잘못된 행정해석으로 이 사태가 빚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복잡한 사정 때문에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은 “근로시간 단축은 법을 개정해 추진하는 것이 맞다”고 밝혔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잘못된 행정해석을 계속 방치할 수는 없다”며 “다만 정부에 잘못이 있고, 국회에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편의적 방안(행정해석 폐기)보다는 사회적 합의와 설득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wol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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