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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김순근의 간이역(9) 미스터리 ‘잃어버린 왕국’의 마지막 발자취를 찾아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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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형왕릉 전경. [사진 김순근]

구형왕릉 전경. [사진 김순근]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왕산(王山. 923.3m) 자락의 계곡 끝에 특이한 돌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산중에 피라미드처럼 쌓아 올린 돌무덤이니 신비로움 마저 느껴진다. 무덤 앞에는 좌우로 문인, 무인석과 사자상 등 석물들이 있어 무덤 주인이 예사롭지 않은 인물임을 짐작게 하는데, 비석엔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 적혀있다.

경남 산청군 금서면 왕산 자락의 계곡 끝 #가야 최후의 구형왕 모신 11m의 돌무덤 #김유신·류의태 등도 만나는 역사산책길

왕산 자락의 으슥한 기슭에 마치 은둔하듯 잠들어 있는 돌무덤의 주인공은 김수로왕이 세운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다. 사적 제214호로 지정돼 있다.

구형왕릉. [사진 김순근]

구형왕릉. [사진 김순근]

일반적인 고분 형태와 달리 다듬지 않은 거친 돌멩이들을 7단으로 층을 지어 높이 11.15m로 쌓아 마치 피라미드처럼 보인다. 평지에 쌓은 일반 피라미드와 달리 구형왕릉은 뒷면의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살려 쌓은 것이 특이하고, 유일한 가야시대 석총이라는 점에서 한 번쯤 둘러볼 가치가 있는 역사유적지다.

더구나 500년 왕국을 잃은 죄책감과 설움을 조금이나마 씻으려는 듯 무거운 돌덩이 아래 누운 비운의 왕이라는 점에서 소슬한 가을바람에 깊은 상념에 젖게 한다.

돌로 쌓은 한국판 피라미드 

구형왕릉. [사진 김순근]

구형왕릉. [사진 김순근]

특히 지난 6월 초 문재인 대통령이 가야 역사문화복원사업을 언급함에 따라 가야에 대한 재조명 움직임이 일고 있는 가운데 많은 부분이 미스터리인 구형왕릉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해를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는 낙동강 유역에서 많이 생산된 철을 바탕으로 급성장해 초기에는 여러 가야 중 맹주국의 위치에 있었으나 서기 400년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진정책으로 인해 급격히 쇠퇴한 뒤 532년 법흥왕 때 신라에 복속된다.

멸망 시기와 과정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이 상이한데,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선 532년 신라 법흥왕 때 구형왕이 왕비 및 아들 셋과 함께 재물과 보물을 바치며 자진해  항복했다고 기록돼 있다. 법흥왕은 가야 왕족에게 진골 지위를 주고 살던 곳을 식읍으로 주어 다스리게 했다.

덕양전. [사진 김순근]

덕양전. [사진 김순근]

반면,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서는 서기 562년 신라 진흥왕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구형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싸웠으나 숫적 열세로 인해 결국 항복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어떻든 구형왕이 나라를 잃은 비운의 왕임에는 분명하다. 승산이 없어 자진해 항복했든, 끝까지 맞서다 손을 들었든 500년 사직을 잃은 왕의 비통함은 변함이 없을 듯하다.

나라를 넘겨준 구형왕은 지금의 산청군 왕산으로 거처를 옮겨 수정궁을 짓고 말년을 보냈다. 구형왕은 죽기전 나라를 잃은 왕이 흙에 묻힐수 없다며 돌로 무덤을 만들라는 유언을 남겨 돌무덤이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렇지만 이 돌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오랫동안 미스터리 상태였다. 왕이 거주했던 곳이어서 왕산(王山)이 되었고 산중에 돌로 쌓은 왕릉이 있다는 기록도 있었지만, 가야 고분과는 양식이 확연히 다른데다 구형왕릉임을 입증할 확실한 근거를 찾지못했다.

구형왕릉. [사진 김순근]

구형왕릉. [사진 김순근]

그래서 오랫동안 구형왕릉으로 전해진다는 뜻의 ‘전(傳) 구형왕릉’으로 표기돼 오다 동국여지승람, 왕산사기 등 여러자료의 고증을 거쳐 구형왕릉으로 확인받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왕릉가는 계곡길 중간쯤에 삼국통일의 영웅인 김유신 장군이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사대비(射臺碑)가 있다는 것. 김유신은 구형왕의 증손자다. 구형왕의 막내아들 김무력이 김유신의 조부인데, 김무력은 아버지가 항복한후 신라의 장수가 되어 혁혁한 공을 세운뒤 각간까지 지위가 올랐다.

김유신은 젊은시절 구형왕릉을 찾아 왕릉을 돌보며 주변에서 무예를 익혔다고 한다. 잃어버린 왕국의 후손 김유신은 이곳에서 갈고 닦은 무예를 바탕으로 매제인 무열왕과 외조카인 문무왕을 도와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니 증조부 구형왕의 한을 풀어준 셈이다.

김유신 사대비. [사진 김순근]

김유신 사대비. [사진 김순근]

왕릉으로 가는 계곡길 초입에 있는 덕양전은 구형왕과 왕비 계화왕후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곳으로 매년 봄, 가을에 김해김씨 종친회에서 제사를 지낸다.

왕릉 입구 주차장에서 왼쪽 왕산으로 가는 등산로를 따라 2km정도 올라가면 류의태 약수터가 있다. 허준 스승인 류의태가 수정처럼 맑은 이곳 약수물로 탕제를 지어 약효가 좋았다고 전해져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이처럼 구형왕릉으로 가는 길은 구형왕릉, 김유신, 류의태 등 서로 다른 시대의 역사적 인물들을 만날 수 있는 색다른 역사산책길이다.

독특한 ‘동의보감촌’

동의보감촌 전경. [사진 산청군 제공]

동의보감촌 전경. [사진 산청군 제공]

왕산 기슭의 류의태 약수터에서 알수 있듯 산청은 류의태 등 많은 명의를 배출한 곳으로, 관내 지리산 자락에 자생한 약초가 1000여종에 이를 정도로 전통 한방의 고장이다. 산청군에서는 이같은 전통을 살리기 위해 지난 2001년 왕산과 필봉산 자락의 해발 400~700m에 118만1000㎡ 규모의 한방을 테마로 한 종합힐링타운 ‘동의보감촌’을 조성했다.

이곳은 지난 2013년 산청세계전통의약엑스포 행사가 열린 엑스포주제관과 한의학박물관, 한방기체험장 등으로 크게 나뉜다. 엑스포주제관과 한의학박물관은 가족 단위 체험 학습에 제격이며 한방기체험장은 석경과 귀감석 등에서 기를 받고 가벼운 테라피를 체험할수 있다.

한방자연휴양림, 한방콘도·휴양텔·식당·약초판매장 등의 시설도 있다. 구형왕릉에서 차로 10여분 거리로 가깝고 왕산 류의태 약수터와 숲길로 이어져 있다.

김순근 여행작가 sk4340s@hanmail.net

[제작 현예슬]

[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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