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대한제국 → 임시정부 → 대한민국 … 근대국가 정신 이어졌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인터뷰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대한제국과 고종 황제를 무기력한 나라, 무능한 군주로 알고 있는 것은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이라고 지적했다. [박종근 기자]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대한제국과 고종 황제를 무기력한 나라, 무능한 군주로 알고 있는 것은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이라고 지적했다. [박종근 기자]

120년 전 오늘이었다. 고종 황제는 근대국가의 시발점인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그는 ‘국가(國家)’라는 말보다 ‘민국(民國)’이란 용어를 더 즐겨 쓰던 군주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고종이 나라를 지칭하며 ‘국가’ 대신 ‘민국’이라 부른 예가 70%나 된다. 당시 고종을 직접 인터뷰했던 선교사들이 남긴 글에는 ‘고종 황제는 나라에서 지식이 가장 높은 인물이다. 신하들이 잘 모르는 게 있으면 군주를 찾아가 물어볼 정도였다. 고종 황제는 그 자리에서 즉답을 하거나 무슨 책을 찾아보라고 일러주었다’고 돼 있다.

고종, 자력에 의한 근대국가 열망 #전기·전차 도입 등 도시개조 박차 #중립국가로 국제사회 진출 구상도 #대한제국 멸망론은 식민사학 관점

우리가 알던 고종과 다르다. 흔히 대한제국과 고종 황제는 그저 ‘무기력한 나라, 무능한 군주’로만 알고 있다. 역사 시간에도 그렇게 배웠다. 25년째 대한제국 역사를 연구 중인 이태진(74) 서울대 명예교수는 “그건 철저히 일제 식민사학의 관점이다. 우리도 모르게 거기에 젖어 있었다”고 지적한다.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둔 11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연구실에서 이 명예교수와 마주 앉았다. 그에게 ‘대한제국의 의미와 일제의 왜곡’에 대해 물었다.

대한제국은 어떤 나라였나.
“대한제국은 자주적 근대화를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던 나라다. 1899년 이미 서울에 전차가 달리고 있었다. 당시 일본 도쿄에는 전차가 없었다. 1902년에야 일본에 전차가 생겼다. 1900년대 초 러일전쟁을 위해 서울에 온 일본군이 서울 시내를 달리는 전차를 보고 신기해하는 자료 사진까지 있다. 고종 황제는 차관 도입을 추진하고,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자력으로 근대국가의 모습을 갖추고 국제사회로 진출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광산 개발과 철도 부설, 지폐 발행을 위한 중앙은행 설립, 전기와 전신 사업 등에도 엄청 애를 썼다.”
대한제국을 일제는 왜 무능한 나라로 왜곡했나.
“식민통치의 합리화를 위해서였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에 대한제국의 근대화는 자력으로 이미 진행 중이었다. 일제는 그걸 부인해야 했다. 조선이 괜찮은 나라였다면 식민지배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래서 ‘망국책임론’이란 프레임을 씌웠다.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고종 정부의 무능함, 둘째는 유교 사상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것이다. 구시대 사상인 유교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는 야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게 식민주의 역사학의 가장 큰 굴레다. 자신도 모르게 우리는 대한제국의 존재를 애써 외면하거나 무시해 오지 않았나.”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재위 1863~1907)인 고종의 사진 . [중앙포토]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재위 1863~1907)인 고종의 사진 . [중앙포토]

고종 황제가 평소 ‘국가(國家)’ 대신 ‘민국(民國)’이라 지칭한 건 어떤 의미인가.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정조가 ‘국가’ 대신 ‘민국’이란 용어를 먼저 썼다. 국가의 ‘가(家)’는 집안을 뜻한다. 고대 국가가 패밀리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이다. 왕조 시대의 패밀리가 누군가. 귀족가문, 다시 말해 사대부다. 정조가 ‘국가’ 대신 ‘민국’이라 부른 건 나라의 중심이 ‘왕과 사대부’가 아니라 ‘왕과 백성’이란 뜻이다. 정조는 만민의 왕이 되고 싶어 했다. 그런 정조의 정신을 고종도 공유하고 있었다. 고종은 ‘적민(積民)이 국(國)이다(백성이 쌓이면 나라다)’는 말도 했다. 서구의 근대국가 개념과도 통하는 정신이다.”
당시는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그걸 뚫고 나가는 고종의 전략은 무엇이었나.
“조선의 근대화, 그리고 중립국 승인이었다. 당시는 일본과 청, 러시아와 영국 등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그걸 뚫고 가려면 덴마크나 벨기에, 스위스처럼 국제사회에서 중립국 승인을 받아야 했다. 우선 근대국가로서 위상을 갖추어야 했다. 1880년대 처음에 전기는 경복궁에만 들어왔다. 고종은 도시개조 사업을 통해 서울 시내에도 전깃불이 들어오게 했다. 전차를 시설할 때는 내탕금 20만원을 선뜻 내놓았다. 근대화한 자주독립국가로 국제사회에 데뷔하고자 했다. 실제 고종의 중립국 승인 외교는 비밀리에 강하고 치밀하게 펼쳐졌고, 뒤늦게 이를 안 일제의 방해공작이 집요하게 이어졌다. ‘대한제국’이란 국호도 고종 황제가 직접 지었다.”
왜 ‘대한제국’이라 지었나.
“고종은 이렇게 말했다. ‘조선이란 나라 이름은 뜻이 아름답고 오랫동안 썼다. 그렇지만 국호를 지을 때 태조 대왕께서 중국에 사신을 보내 ‘조선’과 ‘화령’이란 두 이름을 제시했다. 명나라 태조가 그걸 보고 ‘조선’을 골랐다. 이런 역사를 가진 국호를 가지고 자주국으로 국제사회에 나설 수는 없다. ‘조선’만큼 고대로부터 우리를 가리키는 용어로 ‘한(韓)’이라는 글자가 있다. 그 앞에 ‘대(大)’자를 붙이자. 그래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하자.’ 그러자 신하들이 모두 박수를 쳤다고 한다.”
그래도 대한제국은 망하지 않았나.
“아니다. 그 역시 식민사학의 관점이다. 을사보호조약이나 병합은 군사강점이었다. 대한제국의 국가원수는 끝까지 그걸 인정하지 않았다. 1919년 고종이 독살되자 장례식 이틀 전에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 정신이 상해임시정부로 이어졌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면서 대한제국을 승계했다. 1945년 일제 압제에서 벗어나 48년에 정부수립을 다시 한 것이다. 대한제국 바로 알기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문제이자 세계사 전체의 문제다.”

이태진 명예교수는 12일 오전 9시30분 서울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는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에서 대한제국의 외교전략을 분석해 발표한다.

◆이태진 교수

서울대 사학과 졸업, 서울대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석·박사,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역임, 국사편찬위원장 역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저서로 『일본의 한국병합 강제 연구』 『끝나지 않은 역사』 『동경대생에게 들려준 한국사』 등.

글=백성호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vangogh@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