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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money)가 뭐길래]④ 장애 가진 막내의 8억 원 지켜주기

중앙일보

입력

가족 간에도 돈은 민감한 문제다. 최근 논란이 된 가수 고(故) 김광석 씨 가족도 오랫동안 저작권 분쟁을 했다. 그래서 요즘에는 아예 후견신탁을 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돈 문제로 가족 간에 얼굴을 붉히느니, 차라리 전문 금융기관에 돈 관리를 맡기는 것이다. 치매를 앓는 부모님의 재산, 이혼한 엄마와 함께 살다 홀로 남은 아이의 상속 재산, 새 아빠에게 성추행당한 딸에게 남겨진 공탁금…애매한 돈 문제로 갈등을 겪다 해결점을 찾은 우리 이웃의 이야기를 모아봤다. 김현예 기자 hykim@joongang.co.kr

40대 발달 장애인 이 모 씨와 8억원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살다가 죽게 해주세요."
발달 장애 아이를 두고 있는 부모들의 한결같은 바램이다. ‘도움이 필요한 자식, 어떻게든 내가 돌봐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지난해 12월 세상을 떠난 A(80)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결혼해 아이 넷을 낳았는데, 막내 아들 이 모씨가 발달 장애였다. 다른 자녀 셋을 다 시집·장가 보낸 A씨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막내 아들과 함께 살았다. 그는 자신이 죽으면 누가 막내 아들 뒷바라지를 해줄지 항상 노심초사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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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가 세상을 떠난 뒤 이 씨 형제들은 고민에 빠졌다. 과연 누가 발달 장애 막내 동생을 책임지고 돌 볼 것인가. A씨는 생전 낭비라고는 몰랐던 남편이 모은 현금 8억 원과 9억 원 상당의 집 한채를 남겼다.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형제들은 결국 전문 후견법인인 한국성년후견지원본부에 막내 동생의 후견을 맡기기로 했다. 법원은 이 씨를 보호해줄 후견인을 정하며 재산을 후견신탁하도록 했다(처분명령). 성년후견인 선임과 함께 신탁 명령을 내린 국내 첫 사례였다.

후견신탁을 하는 KEB하나은행은 후견법인과 2주간에 걸쳐 계약서 설계를 했다. 생애주기에 맞춰 이 씨가 생활하는데 필요한 생활비를 산정했다. 이 씨가 어머니와 함께 살아온 집은 신탁하지 않았다. 다만 후견인이 집을 매각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법원의 허가를 받고 매각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우리나라 1호 후견신탁자가 된 이 씨는 현재 전문 후견인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고 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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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견신탁과 발달 장애인

후견(後見)이란 말 그대로 ‘뒤를 봐준다’는 뜻인다. 통상 미성년자 등의 보호자 역할을 대신하는 것을 말하지만, 성인도 치매 등의 질병이나 장애로 일상생활이 힘들 경우 재산관리와 신상보호 역할을 하는 후견인을 둘 수 있다.

국내에는 2013년 7월 1일 성년후견제가 도입됐다. 성년후견인 신청은 법원을 통해 할 수 있다. 법원은 배우자 또는 자녀, 제3자인 전문후견인 중에서 적합한 후견인을 정한다. 후견인은 대상자의 재산관리와 신상보호의 역할을 담당한다. 대법원에 따르면 2013년 637건이었던 후견 신청은 지난해 3209건으로 늘어났다.

우리보다 앞선 2000년 같은 제도를 도입한 일본에서는 후견인이 3억엔(약 30억원)을 빼돌리는 사건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2012년 후견신탁을 통해 후견제도를 보완했다. 후견신탁은 후견인이 담당하던 재산관리를 전문 은행에 맡겨 유용을 막는 제도다. 특정한 목적 외에는 돈이 쓰이지 않도록 설계(특정금융신탁)하면 후견인 또는 친인척이라 하더라도 인출이 불가능하다.

우리 법원 역시 최근 가족 간 분쟁을 줄이기 위해 후견신탁을 이용하고 있다. 세월호 사고로 부모를 잃은 A양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법원은 A양을 돌보던 고모를 임시후견인으로 정하고 보상금 등을 은행에 맡기도록 했다. 매월 A양의 생활비를 고모에게 지급하되, 신탁된 돈의 절반을 A양이 25세에 찾을 수 있도록 했다. 나머지 절반은 30세가 되야 은행에서 찾아쓸 수 있도록 설계했다. 법원은 최근에는 현금성 자산 외에 부동산까지 금융기관에 맡기도록 하고 있다.

후견신탁을 하려면 일반 성인은 금융기관과 직접 계약을 하면 된다. 반면 미성년자나 장애ㆍ질병 등으로 의사결정 능력이 떨어진 성인은 후견신탁을 하기 위해선 법정 후견인이 법원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현재 후견신탁을 운영하는 국내 영리기관은 KEB하나은행 뿐이다. 비영리 기관으로는 사단법인 한국자폐인사랑협회가 운영하는 신탁·의사결정지원센터가 있다. 아산재단의 후원을 받는 이 센터는 발달 장애인을 위한 신탁을 운영하고 있다. 통상 발달 장애인을 위한 신탁계약은 상담-전문가 상담-개인별 평생계획-점검 및 수정 단계를 통해 진행된다. 계약에 필요한 인지대 정도만 지불하면 이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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