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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 너무 쏠려 있었는데 … 이건 좀 달라서 뿌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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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990년대부터 멜로·액션 등에 고루 출연한 배우 이병헌. 영화 ‘남한산성’에서 냉정하게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최명길 역할을 맡았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1990년대부터 멜로·액션 등에 고루 출연한 배우 이병헌. 영화 ‘남한산성’에서 냉정하게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최명길 역할을 맡았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배우 이병헌이 ‘광해, 왕이 된 남자’ 이후 5년 만에 사극을 선택했다. 김훈 작가 남한산성을 각색한 같은 이름의 영화다. ‘도가니’ ‘수상한 그녀’를 만든 황동혁 감독이 연출했다. 병자호란에서 청나라와 화친을 주장하는 이조판서 최명길 역을 맡았다.

영화 ‘남한산성’ 최명길 역 이병헌 #성공한 역사 아닌 치욕의 역사 #병자호란을 시종 담담하게 다뤄 #항전·화친, 두 소신 치우침없이 그려 #상대 역 김윤석은 열 쏟아내는 배우

26일 인터뷰에서 그는 “어떤 이야기를 해도 감정을 누른 채로 해야 하는 역할이었다”고 했다. 김훈 특유의 긴 호흡의 대사가 다소 건조하게 이어지는 이 영화에서 그는 묵직하게 역할을 해냈다.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고민하는 인조(박해일 분) 앞에서 “오랑캐의 발밑을 기어서라도 죽음을 피해야한다”며 청과 맞서 싸우기를 주장한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 분)과 팽팽하게 대립한다. 영화는 추석 연휴를 겨낭하며 다음 달 3일 개봉한다.

‘남한산성’ 완성본을 보니 어떤가.
“그동안 한국 영화들이 너무 천편일률적으로 쏠려있었는데 다른 영화가 나온 것 같다. 뿌듯하다.”
어떤 점에서 다른 영화인가.
“연출부터가 그렇다. 보통은 성공의 역사를 다루는 게 흥행을 위해 좋다. 치욕적이고 암울한 걸 그린 것부터가 용감하다. 또 영화는 관객수 같은 것을 의식하지 않고 시종 담담하고 차분하다. 통쾌하지 않고, 보는 내내 힘들고 답답할 수 있는 영화다. 답을 제시해주는 것도 아니지만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역사를 그리고 있다.”
흥행엔 도움이 되진 않을 수도 있는데.
“많이들 숫자로 영화를 이야기 한다. 내가 영화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이제는 숫자가 영화 제목과 거의 동일하게 이야기된다. 하지만 배우가 영화를 선택할 때는 숫자에 대한 생각이 좀 덜하다. 이야기가 얼마나 울림을 주는가, 얼마나 꽂히느냐가 중요하다.”
병자호란에서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의 47일을 다룬 영화 ‘남한산성’ . [사진 CJ엔터테인먼트]

병자호란에서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의 47일을 다룬 영화 ‘남한산성’ .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최명길이란 인물을 어떻게 이해했나.
“이 시나리오가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소신이 너무 다른 두 명을 치우침 없이 그렸기 때문이다. 보통은 읽는 사람이 한 쪽으로 설득당하게 마련이다. 그래야 재미있고 통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는 그렇지 않았다. 이 사람 얘기를 들으면 이쪽이 맞는 것 같고, 다른 쪽을 들으면 또 그랬다. 100번은 왔다갔다 한 것 같다. 나라를 위한다는 큰 뜻은 같지만 대립하고 있는 두 사람이 정말 50 대 50으로 맞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만약 캐스팅 제의가 왔으면 김상헌(김윤석 분) 역할도 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최명길은 인조반정으로 광해를 몰아냈던 인물이다. 5년 전에는 광해를, 지금은 최명길을 연기한 느낌은 어땠나.
“배우가 연기를 할 때 그 인물과 생각이 100% 일치해서 하지는 않는다. 이해가 안되는데 억지로 연기하는 것도 아니다. 설득 당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서 연기한다. 두 인물은 모두 설득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어쨌든 광해를 내쫓은 최명길을 연기한 것은 아이러니다.”
영화가 현재 한반도 정세와 비슷한데.
“영화를 보고 났는데 누구 편인지 알 수 없는 것, 내가 그 때 왕이었어도 최명길과 김상헌 중 누구 손을 잡아줬을지 판단할 수 없었던 게 너무 슬폈다. 영화를 보면서 답답하기도 했다. 흥행 면에서 문제가 좀 있을 수도 있는 점이지만, 반대로 그게 영화의 매력이기도 하다. 병자호란의 상황은 현재 대한민국과 너무 흡사하다. 지금도 강대국 사이에 끼어있는 것과 공교롭게도 맞닿아있다. 그런데 늘상 그래왔다는 사실이 더 안타깝다.”
‘광해’에 이어 ‘남한산성’까지 영화가 정치·외교 상황 등에 비추어 해석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영화가 시류를 타는 것을 의식하지도, 부담스러워하지도 않는 편이다. 영화가 꼭 시대에 맞닿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판타지나 SF 영화는 어떻게 하나. 아무튼 ‘남한산성’이 시대에 많이 닿아있는 건 맞다.”
상대 배우 김윤석의 연기는 어떻게 봤나.
“우리 둘 다 왕을 향해 대사를 했기 때문에 촬영할 때는 나란히 있었고 얼굴 볼 일이 거의 없었다. 대사의 떨림, 소리만 듣고 느꼈는데 열이 가득한 배우였다. 한번 부딪히는 장면이 있었는데 감정이 달아올라서 ‘자기 자신도 어떤 대사를 하는지 모르면서 연기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열을 쏟아내더라.”
감독에게 아이디어를 많이 내는 편인가.
“질보다 양으로 간다. 예를들면 코미디 장르를 찍을 때 아이디어를 많이 내는데 질이 중요하진 않고 그저 많이 낸다.(웃음) 감독과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인 건 맞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딱 한 군데 바꿨다. 무엇보다 감독이 똑똑해서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았다. 이 영화만큼 모니터링을 안 한 영화는 처음이다.”
후속으로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까지 쉬지 않고 작품을 하고 있다.
“쉬어본 적이 별로 없다. ‘남한산성’ 끝나고 드라마까지 두세달 쯤 비는데 그때 미국 영화 하나 찍자고 미국 매니저에게 연락이 왔다. 그러다 쓰러질 수 있을 것 같아서 거절했다.”(웃음)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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