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교육부의 관규, 엇나간 인문학 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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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진재교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

진재교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

관규(管窺)란 말이 있다. 대롱 구멍으로 표범을 보면 그 가죽의 얼룩점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최근 한국연구재단이 발표한 인문한국플러스(HK+) 지원사업은 인문학의 기본 철학까지 부정한다. 종전 인문한국(HK) 지원사업에 참여한 전국 대학 43개 HK연구소는 지난 10년간 지원을 했으니 앞으로 자활에 나서고 신규 연구소를 선정하겠다는 것이 교육부의 변인데, 그야말로 관규다.

인문은 긴 축적 필요한 분야 #사회·자연 과학의 결실 위해 #영양소 역할 하는 인문학에 #단기 성과 너무 다그치면 곤란

신규 HK연구소를 선정하는 것은 인문학자로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기존 HK연구소의 지원 자격마저 박탈한 것은 난센스다.

이는 HK연구소가 정초(定礎)한 기초 인문학 연구자 집단을 해체하고, 공들여 쌓아온 연구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며, 어젠다 연구의 한 축을 담당한 연구교수와 연구원을 길거리로 내몰기 때문이다. 교육부는 약 4400억원이나 지원한 사업을 연착륙시켜 지속적인 성과를 낼 수 있도록 관리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이번 ‘HK+ 지원사업’으로 대학이 ‘HK 지원사업’ 종료 후 이미 채용한 HK연구소의 교수 인건비를 부담하고, 교육부가 사업비(연구교수와 연구원 인건비 포함)를 지원하는 협력 모델의 가능성마저도 차단하고 말았다.

인문학은 학문의 장에서 자양분과 같고 인간의 성숙에 필요한 영양소와 같다. 경제적 가치로 호환할 수 없지만, 개인의 품격과 대학의 수준 나아가 나라의 격까지도 대변한다. 그러나 인문학은 공장의 상품처럼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온축된 지식 생산 방식을 토대로 나오기 때문에 오랜 시간과 장기 지원이 필요하다. 이제 10년간 지원했으니 스스로 경쟁력을 키워 세계적 연구소로 자활하라는 교육부의 논리는 황당하다. 이는 공장을 세워주었으니 세계적인 상품을 찍어내라는 것과 같은 기능적 발상이다.

본디 ‘HK 지원사업’은 대학의 안과 밖에서 벌어지는 상반된 인문학의 시선 속에서 나온 장기 국책사업이다. 2006년 전국 80여 개 대학의 인문대학장들이 인문학이 처한 현실을 두고 ‘인문학 위기’를 선언한 후 대학 밖에서는 팟캐스트와 각종 인문학 콘서트는 물론 ‘길 위의 인문학’까지 나왔다. 인문학을 둘러싼 엇갈린 현상을 계기로 교육부가 내놓은 것이 바로 이 사업이다.

이것은 다른 사업과 달리 기초인문학 연구자 집단을 육성해 분과학문 중심의 개인 연구에서 연구소 중심으로, 단기 주제가 아닌 장기 어젠다 중심의 협동연구 방식으로 전환하고, 이를 통해 세계 수준의 연구 역량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 각 연구소의 특성에 맞게 30~40년 장기 전망의 어젠다 연구로 세계적인 연구소로 발돋움하는 것까지 염두에 두었다.

43개 HK연구소는 지난 10년 동안 무리 없이 사업을 진행했다. 사업 취지에 맞게 HK연구소 소속의 교수를 뽑고, HK연구교수를 비롯한 총 422명의 기초인문학 연구자 집단을 조직해 연구했다. 이들은 어젠다 중심의 기관 연구를 수행해 학과 소속 교수보다 높은 연구 성과를 내는가 하면 개인 연구가 할 수 없는, 횡단하는 인문학의 길을 개척하고 한국 인문학의 창신(創新)과 함께 새로운 연구 방법도 도출했다.

사실 HK 지원사업과 같은 교육부의 재정 지원사업은 인문학에 큰 영향을 끼친다. 어떤 사업은 대학과 인문학의 생존에까지 연결된다. 지금 교육부에 의존하지 않는 인문학은 성립하기 어렵다. 세계 어느 나라나 인문학은 정부와 사회 각계의 지원으로 발전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지원 과정에서 교육부와 연구재단이 대학과 갑을관계로 존재하는 게 문제다. 만약 이들 국가기관이 엇나간 정책을 시행하면 그 폐해는 어떨까? 교육부가 한국연구재단의 국가적 장치를 통해 대학과 연구자의 지식생산 방식에 개입해 ‘돈’과 ‘프로젝트’로 인문학을 구속하는 현실에서 갑의 존재는 상상을 초월한다. ‘HK 지원사업’의 문제도 교육부의 관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교육부가 결심하면 이 문제는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HK 지원사업’처럼 한국의 인문학이 국가 지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한 교육부의 엇나간 인문학 정책과 은폐된 갑질을 당하더라도 인문학은 하소연할 곳조차 없다. 어쩌면 현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에 인문학이 소외된 현실과 ‘HK 지원사업’을 바라보는 교육부의 관규를 두고 시비하는 자체가 어처구니없다. 이것이 한국 인문학의 자화상이자 교육부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회의하는 인문학자들의 자기 고백임을 영혼 없는 교육부나 무심한 장관은 알기나 할까?

진재교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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