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그들이 거리로 나선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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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서울맹학교(종로구 신교동)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 특수교육기관이란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한글 점자를 제정한 박두성 선생도 이 학교에서 근무했다. 1913년 서대문구 천연동에서 제생원 맹아부로 문을 연 뒤 31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당초엔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을 함께 교육했으나 59년 청각장애인 학교는 따로 분리됐다.

서울 용산초등교(용산구 한강로2가)는 45년 개교한 공립학교다. 한때는 학생수가 3천명에 이르렀지만 현재는 도심 공동화 현상으로 학생이 줄어 전체 8개반에 2백11명만 재학 중이다. 지난 2월 졸업생은 남학생 16명.여학생 17명 등 33명이 전부였다. 학교 건물 2개동 가운데 하나는 텅 비어 있다.

이 두 학교가 최근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시설이 남아도는 용산초등교의 운동장을 절반 갈라 서울맹학교의 직업교육시설을 짓기로 교육인적지원부와 서울시교육청이 허가했기 때문이다.

1백20명 정도를 수용하는 캠퍼스에 재학생이 3백명이 넘는 서울맹학교는 이번에 고등부 이상의 3개 교육과정을 떼어나가 포화상태를 해소하겠다는 계획이다.

이에 대해 용산초등교 학부모와 주민들은 현재 진행 중인 재개발에 따라 4년 후엔 인근에 7천여가구가 입주하므로 학교 축소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초등교 장애인 시설이 아닌 안마.침술 등 성인 교육시설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지난달 19일 치른 서울맹학교의 건축 기공식은 학부모들의 저지로 교문 밖에서 진행됐다. 현재 운동장을 가로질러 담장이 쳐지고 공사를 위한 정지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학교 운동장에 천막을 치고 44일째 농성 중인 용산초등교 학부모들은 2학기 개학일인 어제부터 자녀들의 등교를 거부하고 있다. 장애인 교육시설과 지역주민의 충돌사태는 이번에도 쉽게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장애아가 학교에 다닐 수 있으면 행복한 편이다. 초.중등 취학연령 8백만명 가운데 장애아는 24만명 정도로 추정되나 특수교육을 받는 취학생은 5만5천여명에 불과하다.

특히 장애 영.유아는 3만8천여명으로 추정되지만 95% 이상이 조기 특수교육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 전체 장애인 가운데 51.6%가 초등학교 졸업 이하의 학력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는 분명 복지 후진국이다.

일반인의 별 관심을 끌지는 못했지만 '장애인 교육권연대'의 릴레이 시위가 지난주 내내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며 열렸다. 열악한 장애아 교육 현실을 고발하고 정부와 지자체, 국민의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뙤약볕 속으로 나선 것이다.

지난 2년여간 휠체어로 거리에 나서 지하철과 버스타기 투쟁을 벌여온 '장애인 이동권연대'에 이어 지난달 14개 시민.장애인 단체가 모여 결성한 교육권 연대는 장애인들이 받아온 차별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대변한다.

10년 전 제정된 특수교육진흥법은 장애아에 대한 의무.무상교육을 규정하고 있고, 정부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거창한 계획을 내놓지만 헛구호에 그치고 있다는 주장이다.

장애인 단체들이 최근 저상버스 도입 예산 25억원과 특수교육 예산 2백72억원을 삭감한 기획예산처 앞에서 규탄대회를 연 것을 봐도 이들의 절박함을 알 수 있다.

얼마 전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한 고교야구대회엔 청각장애아로 이뤄진 충주 성심학교 야구팀이 데뷔했다. 비록 1회전에서 콜드게임으로 졌지만 이들이 배트를 휘두르고 달리는 모습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줬다. 더 많은 장애아가 이들처럼 장애를 넘어 꿈과 희망을 키우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날은 언제 쯤일까.

한천수 사회담당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