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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 공백 큰 글로벌 기업, 신사업도 M&A도 안갯속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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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6호 03면

이재용 실형, 충격받은 삼성

25일 서울중앙지법에서 1심 선고 공판을 마친 직후 이재용 부회장이 서울구치소로 돌아가는 호송버스에 탑승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25일 서울중앙지법에서 1심 선고 공판을 마친 직후 이재용 부회장이 서울구치소로 돌아가는 호송버스에 탑승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이재용(49) 부회장에 대해 1심 법원이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한 26일 삼성전자는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서울 태평로 사옥이나 기흥·수원 사업장 등 사무실에서 TV를 통해 재판 결과를 기다렸던 직원들 사이에선 침묵만이 감돌았다. 재판 직후 삼성전자의 한 고위 임원은 “상황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는 예상했으나 막상 접하니 허탈감만 생길 뿐”이라며 “기업 차원에선 공식적으로 드릴 말씀이 없다”고 말했다. 오너의 실형 수감은 1938년 호암 이병철 창업주가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창립한 이후 79년간 처음 있는 일이다.

선고 직후 서초·수원엔 정적만 #선밸리 콘퍼런스 등 불참 따라 #신규 사업 기회 놓치는 악순환 #해외 자본이 경영권 공격할 수도 #이사회 중심 경영 도입 가능성

이번 사태로 10만 삼성 임직원이 받은 충격은 크다. 오너인 이 부회장이 올 2월 구속된 데 이어 최지성 전 미래전략실장(부회장), 그룹 대관업무를 책임졌던 장충기 전 미래전략실 차장(사장)까지 법정 구속됐기 때문이다. 한 4대그룹 대관 담당 임원은 “예전 기업형 비리 사건을 반추해보면 총수는 교도소에 가더라도 2인자는 남아 회사를 챙겼다”며 “삼성 입장에선 전례가 없던 일일뿐더러 미래전략실 핵심 경영진 모두가 공백 상태라는 점에서 내부에서 느끼는 위기감이 다른 기업보다 더 클 것”이라고 말했다.

해외사업 창구 사라지고 전략적 결정 차질

자산 규모만 360조원에 달하는 삼성이 이번 판결로 인해 잃은 것은 크게 세 가지다. 글로벌 무대에서 ‘이재용’이라는 경영인의 평판, 인수합병(M&A)을 비롯한 향후 비즈니스 계획, 그리고 ‘삼성’이라는 브랜드 이미지에 적지 않은 타격을 받은 것이다.

이 부회장은 2010년 이후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정보통신기술(ICT) 업계에서 삼성의 공식 커뮤니케이션 창구 역할을 했다. 매년 3월 중국 보아오포럼, 5월에는 이탈리아 자동차 메이커인 피아트크라이슬러의 지주사인 엑소르의 이사회, 7월 미국 선밸리 콘퍼런스 등에 참석하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네트워크를 다져왔다. 지난 3일 공판 도중 이 부회장은 “미국 선밸리 콘퍼런스는 1년 중 가장 바쁘고 가장 신경 쓰는 출장”이라며 “애플·페이스북 등 20~30개 고객사와 만난다”고 밝히기도 했다.

선밸리 콘퍼런스에는 매년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 등 미국을 대표하는 ICT 기업인이 모여 친목 도모와 함께 각종 비즈니스 현안을 논의한다. 2014년 이 부회장이 이곳에서 팀 쿡과 회동한 직후 삼성전자와 애플이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 국가에서 특허 소송을 모두 취하하기로 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각종 전시회·콘퍼런스에서 해외 기업인들과 교류하며 얻은 지식·통찰력이 대규모 프로젝트나 M&A의 바탕이 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앞으로는 차질이 불가피해졌다”며 “이번 법원 판결로 해외 소비자나 거래처들이 ‘삼성=범죄 집단’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 부회장은 지난달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 피아트크라이슬러(FCA)의 지주사인 엑소르의 사외이사에서도 물러났다.

M&A를 비롯해 전략적 결정에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점도 삼성의 고민거리다. 경영 일선에 본격 등장한 2014년 이후 이 부회장은 미국의 전도유망한 정보기술(IT) 기업들을 잇따라 인수하면서 내부 역량과의 시너지를 추구해왔다. 배타적일 정도로 자체 기술 개발을 강조했던 과거의 삼성과 다른 점이다. 2015년 2월 마그네틱 결제 기술을 보유한 벤처기업 ‘루프페이’, 지난해 10월 인공지능(AI) 플랫폼 개발업체 ‘비브랩스’를 인수한 것이 대표적이다. 두 회사의 기술은 모두 갤럭시 스마트폰에 삼성페이와 AI 비서 빅스비로 새롭게 장착됐다. 그렇지만 지난해 12월 미국 전장업체 하만을 약 9조원에 인수한 것을 마지막으로 올 들어서는 삼성의 M&A 사례가 없다. 노근창 HMC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단기적 영향은 적다고 하더라도 오너의 구속 수감이 길어질수록 M&A를 비롯한 전략적 결정 차원에서 삼성이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권오현·신종균·윤부근 각자 대표 체제로

이 부회장이 구속기소된 올 2월 삼성전자는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이 발표하는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50’에서 탈락했다. 조준웅 특검이 경영권 승계 과정 등을 수사했던 2008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글로벌 마케팅업체 인터브랜드 조사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브랜드 가치는 518억 달러(약 58조원)로 세계 7위다. 하지만 올해 조사에서는 큰 폭으로 떨어질 수 있다. 삼성 경영진의 뇌물 혐의가 최종심에서 확정될 경우 미국 해외부패방지법(FCPA)이 적용될 수 있다는 점도 부담스러운 부분이다. 이 법은 외국 기업이 미국 이외의 다른 나라에서 공무원에게 건넨 뇌물이나 회계 부정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처벌한다. 수천억원의 과징금뿐만 아니라 미국 공공조달 시장에서 퇴출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갤럭시 스마트폰이 미국 공공 시장 입찰에 참여할 수 없게 된다.

시장 일각에서는 헤지펀드의 삼성전자 경영권 간섭 사태를 우려하기도 한다. 이 부회장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이 0.64%(84만403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병태 KAIST 경영대학원 교수는 “2년 전 엘리엇이 배당률 확대, 미국 나스닥 상장 등을 요구한 것보다 더욱 강력한 수준으로 외국계 헤지펀드의 경영 간섭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며 “현재 국회·정부 분위기를 볼 때 미국 차등의결권 제도 같은 경영권 방어 장치를 도입할 가능성이 낮아 딱히 대응책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일단 삼성전자는 지금과 같이 각자 대표 체제로 회사를 운영하기로 했다. 이 부회장의 구속 수감이 이어짐에 따른 불가피한 결정이다. 반도체는 권오현 부회장, 모바일은 신종균 IM부문장(사장), TV·백색가전은 윤부근 CE부문장(사장)이 각각 관할하는 체제다. 3명의 최고경영진 가운데 최선임인 권 부회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해외 순방에 삼성을 대표해 동행했다. 청와대 만찬에도 참석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권 부회장이 일상적인 경영을 책임지겠지만 신사업 진출이나 대규모 M&A 등을 결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삼성의 경영이 보다 선진화된 시스템으로 바뀔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 부회장 스스로도 재판 도중 “지분율을 매개로 총수로 군림하기보다는 전문경영인의 위치에서 경영 능력으로 인정받겠다”는 의지를 수차례 드러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종전까지 삼성의 경영이 ‘총수→미래전략실→계열사’로 이어진 수직적 체제였다면 앞으로는 투명성을 중시하는 이사회 중심의 수평적 체제로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민·염지현 기자 brad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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