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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국무부 "9월 1일까지 북한서 철수해라"…고민빠진 북 체류 미국인 200명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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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윤 평양의대 교수의 부인 조이 윤(오른쪽)의 북한 봉사활동.[이그니스 커뮤니티]

스티븐 윤 평양의대 교수의 부인 조이 윤(오른쪽)의 북한 봉사활동.[이그니스 커뮤니티]

한국계 미국인 의사인 스티븐 윤은 2007년부터 북한 평양 의과대학 소아병동에서 부인 조이 윤과 함께 뇌성마비 환자를 돌봐왔다. 5년 전 선천성 뇌성마비로 인한 사지마비로 서지도 앉지도 못했던 10세 소녀를 1년간치료 끝에 걸어서 퇴원하게 해 북한 관영 매체의 주목을 끌었다.
기독교계 국제봉사단체 ‘이그니스 커뮤니티’의 일원인 이들은 평양 시내에 300만 달러를 들여 5층 건물, 200병상 규모의 소아 척추 재활센터도 짓고 있다. 하지만 미국 국무부가 이달 2일 연방정부 관보를 통해 9월 1일까지 북한에 거주하는 모든 미국인은 모두 떠나라며 여행 금지령을 발포해 스티븐 윤 부부는 세 명의 자녀와 함께 임시로 평양을 떠나 중국에 머물고 있다.

스티븐 윤 평양의대 교수, 이그니스 커뮤니티 공동 설립자

스티븐 윤 평양의대 교수, 이그니스 커뮤니티 공동 설립자

스티븐 윤은 24일 미국의 주간 타임지와 인터뷰에서 "평양으로 돌아가기 위해 주북한 폴란드 대사관 내 아파트 임대계약을 연장한 채 미 국무부의 여행 허가와 함께 재활센터 완공을 위한 재무부의 승인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병원과 뇌성마비 및 자폐증 어린아이들이 북ㆍ미간 정치적 긴장의 2차 희생양이 되고 있다”고 호소했다.
타임지에 따르면 국무부 여행금지령 발효가 1주일밖에 남지 않은 가운데 스티븐 윤과 같은 미국인 약 200명이 북한 김정은 정권 아래에서 살고 있다. 이들의 상당수는 의료를 포함한 국제 구호단체나 선교단체 소속으로 의료ㆍ교육 등 봉사활동을 하거나 러시아와 국경 나진ㆍ선봉 특별경제구역에서 사회적 기업 직원 등으로 일하고 있다.

평양과기대의 강의실. 모든 강의는 미국과 유럽 교수진에 의해 영어로 진행된다. [중앙포토]

평양과기대의 강의실. 모든 강의는 미국과 유럽 교수진에 의해 영어로 진행된다. [중앙포토]

북한 체류 미국인 중 70명은 평양의 남북합작 대학인 평양과학기술대 교직원이다. 평양과기대는 한국계 미국인인 김진경(제임스 김) 공동 총장이 2010년 한국 동북아교육문화협력재단과 미국의 복음 선교 단체의 지원을 받아 서구식 대학으로 개교했다. 현재 학생 600명에 전체 영어 수업을 위해 교수진 전원이 미국과 유럽의 외국인이다.
이 대학의 노마 니콜스 국장은 “북한 학생들이 외부 세계와 다양한 사상에 관해 시야를 갖도록 커리큘럼이 짜여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북한 당국에 의해 정치적 발언이나 토론 등은 일절 금지돼 있다. 올해 초 이 대학에서 회계와 농업개발을 가르치던 한국계 미국인 김상덕, 김학송씨도 적대행위를 빌미로 북한 당국에 억류됐다.
평양과기대도 8월 2일 발표된 북한 여행금지령에 직격탄을 맞았다. 금지령 발표 당일 북한측 공동총장이 전체 외국인 교직원에게 “체류기간 안전을 보장한다”는 서한을 보냈지만 미국 교수진들은 국무부의 지시에 따라 8월 말까지 가족과 함께 북한에서 퇴거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9월 4일 개강은 미국인을 제외한 다른 교직원들만으로 준비하고 있다.

하이드 린튼 '조선의 그리스도인 벗들'(CFK) 사무총장의 평양 방문 모습

하이드 린튼 '조선의 그리스도인 벗들'(CFK) 사무총장의 평양 방문 모습

북한에 머물고 있는 또 다른 미국인들은 1990년대부터 기독교 관련 국제봉사단체 회원들이다. 이들은 미국 국무부 여행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구호활동을 계속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노스캐롤라이나 블랙마운틴의 ‘조선의 그리스도인 벗들(Christian Friends of Korea)’은 1995년부터 북한의 간염 및 결핵치료를 지원하고 있다. 이 단체를 이끄는 하이디 린튼 사무총장은 지난 20여 년간 한 해 석달이상을 북한에서 보내고 있다. 이달에도 8명의 미국인과 3명 노르웨이인, 1명의 호주인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북한에 정수시스템과 B형 간염백신을 지원하기 위해 북한을 여행했다.
하지만 대북 송금 등 금융거래 제재로 인해 인도주의적 구호활동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린튼 사무총장은 최근 북한 시골지역 의료진에게 자전거 대금을 송금하려다가 은행에서 자금을 압류해버려 되찾느라 수주일을 써야 했다.

프랭클린 그레이엄 새매리턴 퍼스 회장(뒷줄 가운데)이 평양 치과병원을 둘러보고 있다.[사마리아인의 지갑]

프랭클린 그레이엄 새매리턴 퍼스 회장(뒷줄 가운데)이 평양 치과병원을 둘러보고 있다.[사마리아인의 지갑]

국제 복음주의 전도로 유명한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장남 프랭클린 그레이엄 ‘사마리아인의 지갑(Samaritan Purse)' 회장도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에 강경한 입장을 취해야겠지만 우리는 국제구호단체로서 일을 계속 하겠다”고 말했다. 지난 20년간 북한에 30여개 팀을 파견한 그는 지난 7월에도 한 팀을 파견해 북한 ‘조·미 민간교류협회’의 요청으로 구입한 5대의 앰블런스를 소아과 병원들에 전달했다. 북한에 대한 국제 구호활동은 그의 아버지인 그레이엄 목사가 1992,94년 두 차례 방북해 김일성 당시 북한 주석과 만난 게 영향이 컸다. 2007년 작고한 어머니 루스 그레이엄도 과거 1930년대 선교사 부모를 따라 평양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이후 자선군ㆍ월드비전ㆍ유진벨재단 등 기독교계 자선단체들의 대북 구호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스티븐 윤 평양의대 교수, 특별허가 위해 중국 대기 #평양과기대 미국인 교직원 70명은 8월 말까지 철수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 "인도적 구호활동 계속할 것"

로버트 킹 전 국무부 북한인권특사는 “인도주의적 활동이 미국의 이미지를 부드럽게 하는 것은 물론 외부 세계와 극도로 고립된 북한에 대한 정보를 공급받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이익”이라고 말했다. 빌 리처드슨 전 뉴멕시코 주지사도 “북한과 외교ㆍ경제접촉이 단절된 상황에서 어느 정도 인도적 접촉을 허용해야 향후 관계 호전에 잠재적 가교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워싱턴=정효식 특파원 jjp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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