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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정담] 오바마·네타냐후도 뒷감당 못한 레드라인의 유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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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선을 한번 긋고 나면 나중에 감당하기 힘든 말이 있다. ‘레드라인’(임계선) 이야기다. 상대방을 향해 “이것이 레드라인이다. 여기를 넘을 경우 엄청난 대가를 각오하라”고 경고하는 지도자는 단호해 보인다. 하지만 한번 내뱉고 나면 부메랑으로 돌아와 스스로를 옥죄기 십상인데, 세계 정상들은 레드라인을 설정하고픈 달콤한 유혹을 쉽게 뿌리치지 못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17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무기화를 레드라인으로 규정했다.

문 대통령 ‘북 ICBM 레드라인’ 논란 #오바마, 시리아 화학무기에 금지선 #사용하자 “내가 선 안 그어” 말 바꿔 #네타냐후, 유엔서 직접 빨간선 그어 #이란 핵문제 대화로 타결되자 망신 #섣부른 레드라인 부메랑 돌아와

오바마 전 미 대통령은 알아사드 정부에 강력한 경고를 했지만 군사행동의 결단을 내리지는 못했다. [중앙포토]

오바마 전 미 대통령은 알아사드 정부에 강력한 경고를 했지만 군사행동의 결단을 내리지는 못했다. [중앙포토]

◆오바마 “내가 그은 레드라인 아니다”=레드라인의 유혹에 넘어간 정상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2012년 8월 시리아의 알아사드 정부가 화학무기 사용을 준비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오바마 전 대통령은 참모들과 마라톤 전략회의를 열었다. 러시아 같은 제3국 중재자를 통해 알아사드 정부에 경고를 보내자는 결론이 나왔다.

그런데 오바마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화학무기를 이동시키거나 사용하는 것이 레드라인”이라며 “이런 일이 생기면 나의 계산을 바꿀 것”이라고 말했다. 원고에 없던 발언이었다. 뉴욕타임스(NYT)는 “전략회의에 참석했던 일부 참모는 ‘대체 어디서 레드라인이 튀어나온 것이냐’며 놀랐다. 당초 계획은 알아사드 정부에 겁을 주는 것이지, 대통령이 어떤 행동에 얽매이게 하려는 게 아니었다”고 보도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1년 뒤 레드라인 발언의 후폭풍에 직면했다. 2013년 8월 알아사드 정부는 수도 다마스쿠스 외곽의 구타 지역에서 민간인을 상대로 화학무기를 사용했고, 약 1400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끝내 군사행동의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2013년 9월 오바마 대통령은 “레드라인은 내가 그은 것이 아니라 전 세계가 그은 것”이라고 슬쩍 말을 바꿨다. 공화당 소속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그 레드라인은 사라지는 잉크로 그은 것임에 틀림없다”고 야유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2012년 9월 유엔총회에서 이란 핵개발 위협과 관련해 폭탄 그림 위에 빨간 매직펜으로 직접 레드라인을 긋고 있다.[중앙포토]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2012년 9월 유엔총회에서 이란 핵개발 위협과 관련해 폭탄 그림 위에 빨간 매직펜으로 직접 레드라인을 긋고 있다.[중앙포토]

◆네타냐후, 빨간펜으로 진짜 레드라인=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란의 핵 개발을 두고 레드라인이란 표현을 썼다. 말로만 한 게 아니라 직접 보여줬다. 2012년 9월 유엔 총회에서 그는 “이란이 내년 여름까지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농축 우라늄을 보유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뇌관에 불이 붙은 폭탄이 그려진 종이를 들어 보인 뒤 주머니에서 매직 펜을 꺼내 90% 바로 밑에 빨간 선을 그으며 “이란이 핵 농축을 마치기 전에 레드라인을 설정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레드라인 퍼포먼스’는 이란 핵협상이 타결된 2015년 다시 화제가 됐다. 백악관이 이란 핵협상 타결을 쉽게 설명하는 그림을 공식 트위터 계정에 올렸는데, 네타냐후 총리가 유엔 총회에 들고 나왔던 것과 같은 폭탄이었다. 90% 밑에 그어진 빨간 선까지 똑같았지만 불붙은 뇌관만 가위로 잘려 있었다. 의회 전문지 더 힐은 “백악관이 네타냐후 총리에게 한 방 날렸다”고 표현했다.

2013년 8월 시리아 정부군이 사용한 화학무기에 희생된 아이들. [중앙포토]

2013년 8월 시리아 정부군이 사용한 화학무기에 희생된 아이들. [중앙포토]

◆“하겠다”는 모호하게=북핵 문제에서 레드라인 설정은 처음이 아니다. 1998년 북한이 탄도미사일 대포동 1호를 시험발사한 뒤 당시 윌리엄 페리 미 대북정책조정관이 작성한 보고서에 이미 레드라인이 등장한다.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또 발사하거나 핵 개발을 할 경우 레드라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북한은 이 레드라인을 거침없이 넘었다. 지금 상황에서 레드라인을 긋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지적이 그래서 나온다.

신각수 전 주일 대사는 “레드라인은 통상 이를 넘으면 비무력적 방법에서 무력적 방법으로 해결 방식이 바뀌는 것을 뜻하는데 문 대통령이 이를 의도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공개 석상에서 너무 자세한 부분까지 언급하면 본말이 전도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 전략사령부 산하 전략자문단 정책소위원회가 95년 작성한 보고서(‘포스트 냉전 시대 억제의 핵심’)에는 ▶상대방이 선을 넘을 경우 우리가 할 대응은 모호하게 규정하되 ▶그 결과가 매우 끔찍할 것임은 명확히 해야 한다는 대목이 있다. 보고서는 또 ▶상대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지목하되 ▶허용되는 행동이 어디까지인지는 밝히지 말아야 한다고 적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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