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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기업에 직원 월급 공개하라는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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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내가 받는 임금이 같은 업종의 다른 회사에서 일하는 근로자보다 적을까 많을까. 차이가 있다면 얼마나 될까. 회사 안에서는 내 월급이 부하나 상사가 받는 것보다 얼마나 적거나 많을까. 정부가 이런 궁금증을 풀어 줄 정책을 준비하고 있다. 기업별 임금 수준을 일반에 공표하는 제도 도입을 검토하기 때문이다.

‘임금분포공시제’ 추진 파장 #직급·직종·남녀 임금 한눈에 비교 #대선 공약, 김영주 장관 다시 언급 #상대적 박탈감, 생산성 저하 우려 커 #전 세계 어느 국가서도 시행 안 해 #“경영권 침해 … 판도라 상자 여는 격”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는 11일 인사청문회에서 “기업의 임금분포공시제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이 제도 시행을 위해 정부는 최근 규제심사까지 한 것으로 확인됐다.

임금분포공시제는 기업별로 직급과 직종 간의 임금 수준과 격차를 공개하는 제도다. 예컨대 같은 과장끼리의 임금분포를 공개하고, 과장 중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임금 차이를 공개하는 식이다. 정규직·비정규직의 임금분포 등도 공개한다.

김영주

김영주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 대선 공약이었다. 지난해 4·13 총선 때도 더불어민주당이 같은 공약을 내걸었다. 기업이 임금분포 기본내역을 작성해 정부에 알리면 고용부가 이를 공시하는 방식이다. 전 세계에 이런 제도를 시행하는 나라는 없다.

이 제도가 도입되면 기업 내부는 물론이고 비슷한 규모의 기업 간 임금 차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임금격차를 한눈에 볼 수 있다. ‘A자동차 회사의 엔진부품 납품회사 과장급 생산직이 월 400만원 받는데 B사의 같은 업종에 일하는 동일 직급의 근로자는 월 300만원 받는다’는 식이다.

당정은 이 제도를 도입하려는 이유로 “근로자의 임금 결정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서”(2017년 대선공약집, 2016년 총선공약집)라고 했다. 2016년 총선 당시 더불어성장론 작성을 주도한 우석훈 국민경제센터소장은 “연봉비밀주의가 평균 연봉 인상을 막고 있다. 평균 연봉을 올리기 위해 관습화돼 있는 연봉비밀주의 대신 연봉공개주의를 강화해 연봉 결정 과정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소득주도 성장을 실현하기 위해 노조에 힘을 실어줘 임금을 대폭 올리도록 압박하겠다는 뜻이다. 총선 당시 정책공약단은 “우선 300인 이상 기업부터 추진한다”고 천명했다.

또 이 제도가 시행되면 "임금 분포의 맨 위와 맨 아래가 변할 것이고, 말단의 대리급 이하 연봉자들의 소득증가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문제는 이 제도가 가진 각종 부작용이다. 임금은 기업의 경영전략이나 성과 등에 따라 책정되는, 시장 자율을 지탱하는 기본 요소다. 이를 정부 통제하에 두는 것은 경영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

성과에 따른 임금체계 도입을 더디게 하고, 성과형 임금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 성과를 내서 승진하는 것이 아니라 승진하지 않아도 위 직급과 임금에서 큰 차이가 없다면 업무상 동기부여가 떨어진다. 생산성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기업 간 임금 비교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이 커질 수 있다. 이는 노사 갈등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또 강력한 힘을 가진 노조가 있는 기업의 근로자만 혜택을 볼 수 있다. 노조 힘이 미약하거나 노조가 없는 중소기업은 협상력 차이에 따른 임금격차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대·중소기업 간 임금격차가 더 커질 수 있다.

정부의 새 제도 도입 의지는 강하다. 이지만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현 정부가 출범한 뒤 규제개혁 심사 안건으로 이 사안을 올렸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당시 기업의 경영 비밀 공개에 따른 부작용, 시장 자율성 침해, 효과 미검증 등의 이유로 의결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익명을 요구한 모 대기업 인사담당자는 “인사시스템상의 판도라 상자를 정부가 강제로 열려는 시도”라며 “경영 기밀을 공표하도록 하고 여론재판 식으로 몰고 가는 것은 일자리 창출에도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업별 근로자 임금 공개에 따른 노사, 노노 갈등과 기업의 경영권 침해 같은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며 “인센티브제 활용과 같은 기존 제도로 격차를 줄이는 방안을 우선 시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wol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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