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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바꾸는 작은 디자인의 힘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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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4호 29면

 휴가지에서 의자의 용도를 제대로 익히고 돌아왔다. 지난해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앞마당에 입고된 의자 ‘엔지스(Enzis)’ 얘기다. 회색빛 건물 사이에서 유독 파란 색감을 자랑하는 플라스틱 소재의 이 의자는 오스트리아 빈시가 기증했다. 사다리꼴의 밑변을 없앤 채 뒤집어 놓은 모양새인데, 의자라기보다 조형물 같다. 혼자 걸터앉거나 눕더라도 공간이 넉넉하다. 익숙한 크기가 아니어서 그런지 털썩 주저앉는 게 늘 조심스러웠다.

빈의 외교 의자 ‘엔지스’

의자의 고향은 빈의 박물관 지구인 뮤지움콰르티어(MQ)의 광장이다. 전 세계에서 에곤 실레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레오폴트 미술관 등 10개의 박물관ㆍ미술관이 광장을 에워싸고 있다. 광장 크기가 웬만한 학교 운동장보다 크다. 이곳에 수십 개의 ‘엔지스’가 광장을 헐렁하게 채우듯 놓여 있다(사진). 건축사무소 PPAG가 2002년 디자인했다. 색깔은 빈 시민들이 온라인 투표로 결정해 때마다 바뀐다.

한낮에 본 MQ 광장의 엔지스는 빛을 받은, 형광 연두빛 조형물이었다. 땡볕 탓인지 앉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 저녁 무렵께 반전이 시작됐다. 퇴근한 빈의 시민들로 MQ는 꽉 찼다. 빈 의자는 없었다. 사람들은 엔지스에 자유롭게 눕고 앉아 놀았다. 노는 데 먹거리도 빠질 수 없었다. 인근 슈퍼에서 맥주와 와인과 안줏거리를 사와 의자를 테이블 삼기도 했다. 홀로 의자를 차지하는 사람보다, 그룹이 많았다. 십수 명이 의자 하나를 둘러싸고 바에 온 것처럼 노는 모습도 보였다.

앉고 눕는 방향은 모두 제각각. 애매한 듯한 의자의 넓이와 기울어진 각도가 오히려 사용자에게 창의성을 발휘하게 한 듯했다. 오후 6~7시면 가게가 문 닫는 빈에서 MQ의 광장은 매일 자정이 넘는 시간에도 사람들로 넘쳐났다. 엔지스 덕에 어둡고 딱딱할 수 있는 광장의 분위기가 한껏 자유로워졌다. 풍경을 바꾼 작은 디자인의 힘이다. 명물이 된 덕분에 엔지스는 ‘유럽의 외교의자’라는 별칭까지 갖게 됐다. 나라 밖 순회전시도 하고, DDP에 놓였듯 외국에 기증도 많이 해서다.

도시의 거리는 크고 작은 공공디자인 콘텐트로 채워져 있다. 눈여겨 보지 않는 의자 하나, 가림막 하나라도 잘 디자인하면 도시 풍경을 바꾼다. 폐쇄적일 수 있는 광장을 열린 커뮤니티 공간으로 바꿔놓은 엔지스의 사례처럼 말이다.

가장 디테일이 살아 있는 디자인 프로젝트로는 일본의 맨홀 뚜껑을 꼽고 싶다.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맨홀 뚜껑 디자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는데 오늘날의 결과물이 놀랍다. 지자체의 95%가 지역 특성을 살렸다. 벚꽃이나 성처럼 지역을 대표하는 풍경이나 식물ㆍ동물 문양을 컬러풀하게 새겨 넣었다. 이색적인 디자인이 많다 보니 이를 찾아다니며 사진 찍고 수집하는 이들도 생겨날 정도다. 각 지자체는 맨홀 뚜껑의 사진과 위치, 디자인 유래 등을 담은 ‘카드’를 제작해 수집가들을 유혹하고 있다. 흔한 하수도 뚜껑이 디자인 덕분에 지역 홍보의 대표 선수로 우뚝 선 셈이다.

한국의 풍경을 바꾸거나 디테일하게 완성시킨 디자인으로 뭐가 있을까. 꼭 필요해서라기보다 어떻게 보면 잉여로울 수 있는, 하지만 우리 도시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디자인이 선뜻 떠올려지지 않는다. 휴가를 마치고 마지막 짐정리를 하며 녹색 여권을 원래 있던 서랍에 넣었다. 일 년에 몇 번 사용할까말까한 여권이라지만 참 오래도록 변함없이 칙칙하다. 왜 바뀌지 않는걸까. 여행지에서 여권 인증샷을 찍고 싶을만큼의 디자인 퀄리티를 우리 공공디자인에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빈(오스트리아) 글ㆍ사진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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