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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시간의 영욕의 드라마....박기영 사퇴의 전말

중앙일보

입력

97시간의 영욕(榮辱)의 드라마였다.
 박기영 순천대 교수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차관급)으로 임명됐다는 사실이 발표된 건 7일 오후 5시 40분이었다.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은 “탄탄한 이론적 기반과 다양한 실무경험을 겸비해 4차 산업혁명 대응을 위한 핵심과학기술 연구개발 지원 및 과학기술분야의 변화와 혁신을 이끌어나갈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20조원에 달하는 문재인 정부의 연구개발(R&D)을 관장할 수장이 된 순간이었다.
 영예는 짧았다. 70분 뒤 MBC의 한학수 PD가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글을 올리면서 박 교수의 운명이 바뀌었다. 한 PD는 2005년 ‘황우석 사태’를 파헤친 MBC PD수첩의 취재진이었다. 그는 “나는 왜 문재인 정부가 이런 인물을 중용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박 교수는) 황금박쥐(황우석·김병준·박기영·진대제)의 일원으로 황우석 교수를 적극적으로 비호했던 인물”이라고 했다. 이어 “노무현 대통령의 눈과 귀가 돼야 했을 임무를 망각하고 오히려 더 진실을 가려 노무현 정부의 몰락에 일조했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가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정보과학기술보좌관으로 황우석 박사의 연구 지원을 위한 콘트롤타워 역할을 한 걸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박 교수는 당시 기여 없이 논문 공저자로 이름을 올렸고 2억 5000만원의 연구비를 받은 사실도 드러났었다.
 다음날 과학기술계가 반발했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과 가까운 진보 진영이 적극적이었다. 민주노총 산하 공공연구노조가 지난 8일 ‘한국 과학기술의 부고(訃告)를 띄운다’는 성명을 냈다. 곧이어 참여연대와 건강과대안·녹색연합·보건의료단체연합·시민과학센터 등 9개 단체도 박 교수의 사퇴 요구에 동참했다.
 정의당의 최석 대변인도 정당 중 가장 빨리 “과연 양심과 윤리를 지키고자 하는 과학자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기 바란다”는 논평을 냈다.
 자유한국당·국민의당·바른정당도 동조했다. 주호영 바른정당 원내대표는 “노무현 청와대 근무자는 무조건 기용되는 ‘노무현 하이패스·프리패스’ 인사”라고 비판했다.
 10일 오후 2시 30분 박 교수가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그는 정책간담회를 통해 “구국의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다”거나 “일할 기회를 허락해주면 혼신의 힘을 다 해서 노력하겠다”고 했다. 11년 만에 황우석 사태에 대해 사과도 했다.
 같은 날 오후 7시엔 청와대도 거들었다. 박수현 대변인은 문 대통령의 발언을 전하는 형식으로 “인사 문제로 걱정을 끼쳐드려 국민들께 송구스럽다”면서도 “과(過)와 함께 공(功)도 평가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 무렵 청와대에선 “문 대통령은 박 교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확고하기 때문에 물러나게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했다.
 한 번 타오른 반발의 불길은 그러나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거세졌다. 서울대 자연대를 중심으로 반대 서명 운동에 들어갔다. 문 대통령과 가까운 더불어민주당 손혜원 의원은 11일 새벽 SNS에 “(문 대통령과 박 교수는) 오래 함께 일했으니 익숙하고 또 든든하셨을 것”이라면서도 “과학계에서 이렇게 반대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썼다. 이날 낮 288명의 서울대 교수들이 성명을 발표했다. 고려대 교수의회가 서명 운동에 착수했다. 한국생명윤리학회 등 12개 단체도 경질을 촉구했다. 결국 박 본부장은 11일 오후 6시50분 자진 사퇴 의사를 밝혔다.
고정애·유성운 기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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