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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정치 논리에 휘둘려 산으로 가는 세제 개편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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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하남현 경제부 기자

하남현 경제부 기자

정부는 매년 8월 초에 그해 세법개정안을 내놓는다. 세금과 관련된 법을 정하는 것이라 매우 민감하다. 그래서 정부는 중요한 세법을 바꿀 때 여론의 추이를 면밀히 살피려 한다. 주요 수단이 공청회다. 올해만 해도 경유세, 소득세 공제제도 개선 방안 등에 대한 공청회가 열렸다. 시간을 두고 여론 동향을 살펴 도입 여부를 정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여권 운 띄우자 기재부 개정안 마련 #정치권 ‘명예 과세’ ‘사랑 과세’ 등 #깊이 있는 논의 대신 말잔치만 벌여 #파급 효과까지 고려한 ‘로드맵’ 짜야

2017년 세법개정안의 핵심은 법인세·소득세의 명목세율 인상이다.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감세정책에서 방향을 틀었다. 단지 수치를 바꾸는 것 이상의 중요한 정책적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이런 명목세율 인상이 10여 일만에 마무리됐다. 지난달 21일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김부겸 행정자치부 장관이 증세의 운을 띄웠고, 다음날 문재인 대통령은 “방향은 정해졌다”며 이를 뒷받침했다. 기존 세율을 손대지 않는다는 전제로 개정안을 마련해놨던 기획재정부는 다급해졌다. 부랴부랴 야당의 주장을 반영해 ‘부자 증세’가 담긴 개정안을 지난 2일 내놔야 했다. 입법예고·국회 제출 등의 일정을 고려하면 정부 입장에서 세법개정안 발표를 더 미룰 수도 없었다. 불과 열흘 만에 여론의 동향을 살피고 장기적인 파급 효과를 제대로 분석할 수는 없다. ‘날림 증세’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정부가 허겁지겁 개정안을 바꾸는 동안 정치권은 ‘말장난’을 벌였다. 여당은 증세를 합리화하기 위해 ‘명예 과세’, ‘사랑 과세’, ‘존경 과세’라는 이름을 지었다. 증세 대상이 극히 일부인 초고소득층이나 대기업에 한정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증세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는 사라졌고 여론전만 난무했다.

속전속결식으로 이뤄진 정부 안도 ‘누더기’가 될 수 있다. 세법개정안은 국회 문턱을 넘어야 한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야당의 협조가 필수적인데, 야당은 증세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어 국회 통과가 불투명하다. 정치적 이해에 따라 법안이 뜯어고쳐지면 정부 안은 대폭 바뀔 가능성도 있다. 기재부가 세법을 관장한다고 하지만 정부안을 지킬 힘이 없다는 건 이번 세법개정 과정 속에서도 드러났다. 그간 “명목세율 인상은 없다”고 했던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허언(虛言)’을 한 셈이 됐고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명해야 했다.

신중한 고려없이 쉽게 갈아엎는 세법은 후유증을 남긴다. 지난 2013년 정부가 소득공제 방식을 세액공제 방식으로 바꾸면서 ‘유리지갑 털기’라는 비판이 일었다. 이에 정부는 급히 과세 구간의 기준선을 올리고, 세금 감면 혜택을 늘렸다. 이 결과 근로자 중 세금을 한푼도 안내는 면세자 비율은 2013년 32%에서 2014년 48%로 급증했다. 이는 정부에 두고두고 부담이 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공약 이행에 178조원이 필요하다고 추산하고 있다. 이런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선 추가적인 증세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앞으로도 증세 논의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정부는 증세에 대한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세원을 어느정도 '넓혀야 할지, 파급효과는 어떤 게 있는 지 등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를 해야 한다. “이번 처럼 정치 논리가 앞서면 세제는 망가질 수밖에 없다”(이만우 고려대 경영학부 교수)라는 지적을 정부와 정치권은 이제라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하남현 경제부 기자 ha.nam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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