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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핀셋 증세, 그럴 줄 알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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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경제 관료들은 숫자에 살고 숫자에 죽는다. 정권 교체기, 요즘처럼 부자 증세니 탈(脫)원전이니 정책의 틀이 확 바뀔 때는 특히 더하다. 숫자를 얼마나 잘 다루느냐에 따라 유·무능은 물론 인생이 갈릴 수 있다. 그렇다고 아무 숫자나 들이댔다간 큰일 난다. 조작·왜곡은 금물이다. 반대 진영의 역풍을 맞아 한 방에 훅 갈 수 있다. 최고의 숫자는 사실(Fact)이다. 그러나 사실이란 게 어디 정권 입맛 따라 “나 여기 있소”하고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오는 놈인가.

보편 복지 위한 국민 증세 #한 줄 언급 안 한 세제 개편

그렇다고 포기할 관료들이 아니다. 어떻게든 (정권 철학에) 맞는 숫자들을 찾아내고야 만다. 기본 공식은 같다. 유리한 것은 넣고 불리한 것은 뺀다. 잘 안 쓰이거나 보조적 지표로 사용하던 것을 앞으로 끌어낸다. 살짝 본말을 바꾸면 된다. 역대 정부의 세제 개편안엔 늘 이런 ‘정권 친화적 숫자의 법칙’이 작동해 왔다. 오늘 선보인 새 정부의 첫 세제 개편안은 어떨까.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다. “증세 없다”에서 ‘부자 증세’로 급선회하는 바람에 서두른 흔적까지 더해져 모양새를 많이 구겼다.

우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형 숫자가 눈에 띈다. ‘부자 증세’를 정당화하려면 ‘양극화가 심해졌다’를 한눈에 보여주는 숫자가 필요하다. 보통은 지니계수를 쓴다. 이 숫자가 높으면 소득 불평등이 크다는 의미다. 그런데 한국의 지니계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국 중에서 양호한 편이다. 그러니 지니계수로는 설득력이 약하다. 대신 보조 지표가 등장했다. 지니계수 개선율이다. 이 숫자는 세금을 걷기 전과 걷은 후를 비교해 빈곤율이 얼마나 개선됐는지를 따진다. 숫자가 클수록 불평등 개선 효과가 높다. 2014년 한국은 13.5%로 독일(42.2%)·영국(31.3%)은 물론 미국(22.4%)보다 낮다.

하지만 지니계수 개선율이 낮은 것은 부자에게 세금을 덜 걷어서가 아니다. 세금은 많이 걷지만 공제해주는 것도 많기 때문이다. 기부금·교육비와 카드 사용액 등을 소득공제해 주는데, 많이 쓰는 고소득자가 더 많이 공제받는 구조다. 무상보육·무상교육·무상급식, 반값 등록금 같은 무상 시리즈도 한몫했다. 빈곤층에 더 많이 줘야 불평등 개선 효과가 큰데, 부자·서민 똑같이 주다 보니 세금을 통한 빈곤율 해소가 잘 안 될 수밖에 없다. 이런 걸 짐짓 모른 척 ‘부자 증세’에 꿰맞춘 혐의가 짙다.

법인세율 인상(22→25%)도 마찬가지다. 역시 다른 나라보다 세금이 적다는 ‘증거’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온 게 OECD 국가 중 G20 국가 11개국 평균 최고 법인세율이 24.7%라는 숫자다. OECD 35개국 평균이 22.7%란 사실은 생략됐다. 세계적으로 법인세 인하 바람이 불고 있고 미국은 15%로 낮출 예정이라 중국 같은 큰 덩치도 자본 유출을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소득세 최고세율 인상도 또 어떤가. 40→42%(5억원 초과)로 올리면서 OECD 평균이 41.9%라고 적시했다. 상대적으로 세율이 낮은 나라 10곳을 빼고 25개국만 평균을 낸 것이다. 35개국을 다 넣은 OECD 평균은 2015년 35.5%다. 물론 이 숫자도 빠졌다.

“‘정책을 돈으로 환산한 게 예산(김동연 경제부총리)’이라면 ‘국정 철학을 돈으로 환산한 게 세제 개편안’이다. 일자리 창출, 양극화 해소, 내 삶을 책임지는 나라…. 이번 세제 개편안에 철학은 차고 넘친다. 그런데 그 철학을 실천할 수단(돈)은 고작 ‘부자 증세’ ‘핀셋 증세’뿐이다. 철학 과잉을 감당할 숫자는 없다. 아무리 뛰어난 관료라도 불가능하다. 핀셋 증세로는 핀셋 복지밖에 할 수 없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