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를 담는 게 출판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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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2호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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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이 사양산업이라는 말은 오래 전부터 유령처럼 떠돌았다. 독서 인구가 줄어들고 책이 팔리지 않으니 출판은 기울어가는 산업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런 이야기의 근거가 별로 없다. 조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종이를 올드 미디어로 분류하고 뉴미디어에 매혹당한 시대의 착각이다.

종이는 수천년간 정보 담은 매체 #올드미디어 아니고 장점 수두룩 #전자책도 ISBN 부여받은 책 #출판 8조원 시장 지닌 성장 산업 #창작자 위한 플랫폼 될 수 있어 #콘텐트도 인문학 뿌리 만나야 발전

우선 종이는 올드미디어가 아니다. 종이는 수천년을 버텨온 내구성이 있으면서 외부 에너지원에 의존하지 않고 정보를 담을 수 있는 드문 매체다. 첨단 기술을 통해 종이의 두께·무게·색깔·촉감 등을 조정하는데 필요에 따라 엄청나게 다양한 종이가 만들어진다. 반사가 적고 질긴, 변색이 되지 않는 종이와 같이 기능적인 다양성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색깔과 감정까지 건드리는 물건이다. 물론 전자기술에 기반한 뉴미디어와 같이 시공간을 눈 깜짝할 사이에 뛰어넘지는 못한다. 엄청난 양의 정보를 집적할 수도 없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렇게나 접을 수도 있고 오지에 가지고 가서 배터리 걱정할 필요 없는 종이의 장점도 많다.

더 큰 착각은 뉴미디어에 콘텐츠를 담는 일을 출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이다. 전자책은 공식적으로 ISBN(국제표준도서번호)을 부여받는 책이고 책을 만드는 것은 출판이다. 더 나아가 뉴미디어에 콘텐츠를 기획하고 담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결과물은 출판 행위의 산물이다.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책을 만드는 일만으로 좁혀도 출판은 2012년을 기점으로 상승세를 타고 있고 재벌닷컴의 발표에 따르면 출판의 업종별 직원 증가율도 높다. 출판을 콘텐츠를 기획하고 그 콘텐츠를 미디어에 담는 일 전체로 확장한다면 분명히 성장하는 산업이다. 범위가 불분명해서 산업규모를 추산한 자료도 제각각이지만 많게는 8조원까지 규모를 잡으니 덩치도 큰 편이다.

그런데도 출판이 사양 산업으로 치부된 데는 무엇보다도 부가가치가 큰 콘텐츠 산업을 미래의 성장 동력이라고 본 정부에서 지원 정책을 만들면서 출판을 콘텐츠와 분리시킨 탓이 크다. 최근에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관하는 콘텐츠 진흥 중장기 정책 수립 회의에 가 보고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몇 가지 있다. 영화, 애니·캐릭터, 게임, 음악, 스토리·웹툰·패션, 방송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주관 부서에서는 이들을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신성장 동력이라고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한 가지 놀라웠던 것은 전통적으로 콘텐츠 산업을 주도해 왔던 출판이 콘텐츠 분야의 계획을 세우고 대책을 논의하는데 처음으로 참가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반복해서 이야기하지만 출판은 위에 열거한 콘텐츠 분야의 플랫폼이었고 앞으로도 플랫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굳이 출판에서부터 떨어뜨려 다시 특화된 회사를 세우고 산업 생태계를 부러 만들려고 하니 어려움도 많고 시행착오도 더 겪는다. 분야마다 공통적으로 호소하는 가장 큰 어려움은 창작자들이 소속 없이, 혹은 영세 업체에 소속되어 좋은 환경에서 콘텐츠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생태계가 잘 형성되어 있는 출판에서 이 콘텐츠들을 분리하지 않고 출판사들이 이 콘텐츠들을 지탱하도록 설계를 했으면 지금 겪는 어려움을 많이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세계 7위 정도의 규모를 가지고 있는 한국의 출판은 서구와 후발 산업국가 대부분이 과점에 가까운 몇몇 출판사가 시장을 장악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출판 시장은 오히려 지적 다양성을 유지하면서 역동적인 발전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다만, 개별 출판사들의 규모가 외국과 비교해서 작아서 갖추기 어려운 인프라에 대한 제도적 지원만 이루어진다면 출판이 오히려 어려움을 겪는 많은 콘텐츠 분야의 창작자들을 위한 그릇이 돼줄 수 있다. 더구나 출판이라는 그릇을 통해서, 자연스레 문학이나 역사와 같은 분야와 콘텐츠 산업이 연결되는 것이 앞으로의 발전에 필수적이다.

정부에서 주력하려는 콘텐츠 분야는 모든 콘텐츠의 뿌리가 되는 문학이나 역사와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문학은 여전히 콘텐츠 산업에서 규모로 보나 영향력으로 보나 가장 큰 분야인데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콘텐츠라는 외래어를 붙이기 어려웠던 것일까? 역사와 같은 기초 연구가 없으면 새로운 콘텐츠가 탄생할 수가 없다. 출판이라는 그릇을 통해 콘텐츠 산업이 문학과 인문학의 뿌리를 만나면 가장 이상적이고 균형 있는 콘텐츠 분야의 발전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출판은 사양산업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따져보면 부실기업은 있어도 사양산업은 없다.

주일우
이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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