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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을 환호로 바꿨다, 스피스 13번홀의 선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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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스피스(왼쪽)가 13번 홀 모래 둔덕에서 홀 공략을 고민하는 장면. 지난해 마스터스에서 5타 차 선두를 달리다 개울에 공을 두 번 빠뜨리고 무너졌던 스피스는 이번에 냉정한 대처로 재역전 우승했다. [AP=연합뉴스]

스피스(왼쪽)가 13번 홀 모래 둔덕에서 홀 공략을 고민하는 장면. 지난해 마스터스에서 5타 차 선두를 달리다 개울에 공을 두 번 빠뜨리고 무너졌던 스피스는 이번에 냉정한 대처로 재역전 우승했다. [AP=연합뉴스]

조던 스피스(24·미국)가 24일(한국시간) 오전 잉글랜드 리버풀 인근 로열 버크데일 골프장에서 끝난 146회 디 오픈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최종 라운드에서 1언더파, 합계 12언더파로 매트 쿠차(39·미국)를 3타 차로 제쳤다.

손에 땀 쥔 디 오픈 우승 드라마 #티샷 악성 슬라이스로 깊은 러프 #1벌타 먹고 연습장 트럭 옆에 드롭 #룰 잘 이용, 치기 편한 곳에서 샷 #대형사고 날 위기서 보기로 막고 #버디·이글·버디·버디로 역전승 #“메이저 사상 가장 위대한 보기” 평 #커리어 그랜드슬램에 바짝 다가서

스피스는 13번 홀(파4)에서 티샷을 한 뒤 머리를 움켜쥐었다. 슬라이스가 난 공은 바람을 타고 페어웨이 오른쪽으로 날아가더니 둔덕 위에 서 있던 갤러리를 맞고 깊은 러프 속에 빠졌다. 다행히 공은 찾았지만 풀이 길고 질겨 샷을 하기 쉽지 않은 곳이었다. 저스틴 토마스(24·미국)는 2라운드, 비슷한 곳에서 공을 치려다 퀸튜플보기(기준 타수보다 5타가 많은 것)를 했다.

스피스는 공을 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일단 ‘언플레이어블 볼’을 선언했다. 이 경우 선택은 세 가지다. 친 곳(티잉그라운드)으로 돌아가거나 두 클럽 이내 드롭, 아니면 홀과 공이 있던 곳을 연결하는 직후방 선상에 드롭하는 것이다. 티잉그라운드는 너무 멀었다. 500야드가 넘는 홀이어서 티잉그라운드로 돌아간다면 최소한 더블보기를 각오해야 했다. 두 클럽 이내 드롭을 하려고 해도 모두 풀이 무성하게 자란 러프 지역이었다. 스피스는 세 번째 경우를 선택했다. 그는 우선 공을 치기에 좋은 장소를 세심하게 찾았다. 공이 떨어진 곳의 직후방인 언덕을 넘어가더니 연습장 구석에 있던 대형 트레일러(투어밴) 옆에 드롭하겠다고 했다. 이 차량은 일시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장애물(TIO : Temporary Immovable Obstructions)이었다. 스윙이나 스탠스에 방해가 될 경우 벌타 없이 드롭할 수 있다.

스피스는 구제를 받고 트레일러 옆쪽의 평평한 지형에 공을 드롭했다. 홀과의 거리를 가늠하기도 쉽지 않았다. 스피스는 270야드, 캐디는 230야드로 생각했다. 앞쪽의 커다란 둔덕을 뛰어 다니면서 거리를 쟀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모세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찾아 광야를 헤매는 것 같다는 빈정거림이 나왔다. 스피스는 냉정하게 할 일을 했고 결국 하이브리드로 그린 앞쪽에 공을 떨어뜨렸고 4번째 샷만에 그린에 올린 뒤 1퍼트로 보기를 했다. 공을 찾고 드롭하는 시간은 20분이나 걸렸다. 그러나 스피스는 최소한 더블 보기, 최악의 경우 쿼드러플 보기 이상도 될 수도 있는 위기 상황을 보기로 막았다. 흥분된 상황에서 서두르지 않았고 골프규칙을 정확히 알고 냉철히 대응했다.

미국의 골프 저널리스트인 댄 젠킨스는 “메이저 대회 사상 가장 위대한 보기”라고 말했다. 미국 골프채널은 “스피스의 드롭 장소에 기념비를 세워야 한다”고 했다. 스피스의 캐디는 “훌륭한 보기였지만 스트레스가 너무 컸다.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 홀을 보기로 막은 이후 스피스는 확 달라졌다. 파 3인 14번 홀에서 거의 홀인원이 될 뻔한 티샷을 한 뒤 버디를 잡았다. 파 5인 15번 홀에서는 2온에 성공한 뒤 15m 거리에서 이글 퍼트를 집어넣었다. 눈빛이 달라졌고, 자신감이 넘쳤다. 스피스는 다음 홀에서 10m 버디를 또 우겨넣은데 이어 그 다음 홀인 17번홀에서 또 버디를 추가했다. 13번 홀에서 잠시 쿠차에게 역전을 허용했던 스피스는 이후 버디-이글-버디-버디를 했다. 전성기의 타이거 우즈 같았다. 스피스는 “내 속의 가장 많은 것을 끌어낸 라운드였다”고 말했다.

2015년 마스터스와 US오픈에서 우승한 스피스는 이로써 메이저 3승을 기록했다. 2015년 세인트앤드루스 올드코스에서 열린 디 오픈에서 한 타가 모자라 연장전에 가지 못한 한도 풀었다. 그는 힘 보다 경험이 중요한 디 오픈에서 1979년 세베 바예스트로스(당시 22세·스페인) 이후 가장 어린 챔피언이 됐다.

세계 골프사에서 만 24세 이전에 메이저 대회 3승을 한 선수는 진 사라센, 잭 니클라우스, 스피스 뿐이다. 스피스는 우즈를 추월했다고 할 수도 있다. 스피스는 그러나 “우즈, 니클라우스와 비교는 적절하지 않다. 그들은 골프라는 스포츠를 만들고 다듬었다. 나는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출발이 좋지만 아직 할 일이 많다”고 말했다. 스피스는 갈림길에 있었다. 이번 대회에서 역전패했다면 지난해 마스터스 12번홀에서 개울에 공을 두 번 빠뜨린 쿼드러플 보기 사건에 이어 메이저 징크스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뛰어난 집중력으로 우승을 차지하면서 상처를 깨끗이 씻었다. 그는 다음달 PGA 챔피언십에 출전한다. 이 대회에서 우승한다면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기록하게 된다.

조던 스피스는 …

● 생년월일: 1993년 7월27일
● 신체조건: 키 1m86㎝, 몸무게 84
● 세계랭킹: 3위
● 메이저대회 우승: 2015 마스터스
2015 US오픈, 2017 디 오픈
● PGA 투어 우승: 11승
2017년 기록
페덱스컵 랭킹 1위
평균 스코어 2위(69.34타)
라운드당 평균 버디 수 2위(4.64개)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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