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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온돌방 36.5] "기부 덕에 6개월 시한부 인생 6년이 됐죠"…인생 절반이 '나누는 삶' 황옥순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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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 덕분에 6개월 시한부 인생이 6년 됐죠."

  올해 나이로 일흔여섯, 하지만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황옥순(인천 계양구)씨의 목소리는 훨씬 젊어 보였다. 장학금 기부 등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그는 21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기부가 행복이자 즐거움'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인생의 절반인 38년 동안 이웃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황옥순씨. 어려운 형편 탓에 공부를 제대로 마치지 못 한 그는 특히 어린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기부하는 데 열심이다. [사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인생의 절반인 38년 동안 이웃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황옥순씨. 어려운 형편 탓에 공부를 제대로 마치지 못 한 그는 특히 어린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기부하는 데 열심이다. [사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그래서일까. 힘들었던 과거도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는 2012년 서울의 큰 병원에서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갑자기 쓰러지는 등 몸의 이상을 감지하고 병원을 찾았지만, 이미 암 덩어리는 그의 몸을 갉아먹은 지 오래였다. 당시 주치의는 "6개월 남았다"는 말을 황씨에게 전했다. 당시를 돌이켜보면 잊히지 않는다.

"그땐 참 힘들었는데 부지런히 돌아다니다 보니 6년 살았죠. 건강 좋아지는 데 기부가 도움이 많이 됐지. 기부하는 마음은 아픈 뒤에 더 절절해졌어요."

  그는 몸이 아프고 죽음이 다가오자 서둘러 '주변 정리'에 나섰다. 그에게 주변 정리란 남은 돈을 사회에 아낌없이 환원하는 '기부'를 뜻했다. 대표적인 게 딸이 다녔던 인천 계산여고에 장학금 5억원을 전달하고 인천 지역 저소득 가정에는 쌀·현금을 지원한 것이다. 나눔과 기부의 힘이었을까. 지난해 '완치 판정'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기적이 찾아왔다. 투병의 영향으로 신장이 나빠지고 이가 빠지는 등 몸 전체가 온전치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살아요"라고 강조하는 그다.

38년째 이웃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황옥순씨. 그는 기부 덕분에 암도 이겨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사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38년째 이웃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황옥순씨. 그는 기부 덕분에 암도 이겨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사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지금껏 걸어온 황씨의 삶도 암을 극복하는 과정처럼 녹록지 않았다. 개성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이 나면서 남으로 피난을 왔다. 15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소녀 가장'이 됐다. 6남매 중 셋째였지만 큰오빠는 군 입대, 큰언니는 출가하면서 동생들을 오롯이 키워야 했다.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애들 데리고 학교에 갈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그만뒀죠. 그때 경험이 남아서 평생 한이 되더라구요."

황씨, 2012년 폐암 말기 판정에도 기적적 '완치' #"건강 회복에 기부가 도움, 아픈 뒤에 더 절절해져" #죽음 다가오자 여고 장학금 전달, 저소득층 지원 #15살 때 '소녀가장', 학업 대신 생계 전선 뛰어들어 #공부 못 마친 '한'에 38년 전부터 기부 활동 시작 #조용히 나눔 실천하다 15년 전 '선행' 널리 알려져 #학생에 대한 애정 담아 장학금, 가족도 적극 응원 #"저녁에 누우면 기부해준 사람 웃는 얼굴 떠올라" #"나눠주면서 사는 게 행복, 마지막까지 행복 느꼈으면"

  공부에 대한 아쉬움도 잠시, 그는 생계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타자수, 장사, 파출부…. 그야말로 안 해본 일이 없었다. 하루에 3~4시간도 채 자지 못할 정도로 일했다. 그러다가 38년 전부터 오래된 꿈을 펼치기로 했다. 딸이 다니던 초등학교의 아이들을 위해 기부금을 내놓은 것이다. 본인도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때를 미룰 순 없었다고 한다.

"힘든 생활이었지만 도움 주신 분들이 밤낮으로 잊히지 않았죠.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으면 어떤 학생이라도 도와주겠다는 마음으로 살았어요. 그러다 셋방살이를 해도 남을 돕자고 해서 학교에 기부를 처음 시작했어요."

  이후 황씨는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형편이 나아지자 경제적으로 어려운 아이들을 찾아내서 남몰래 도와주고, 인근 지역의 독거 노인에게 끼니도 지원했다. 사업이 위기에 빠지고 빚더미에 앉아도 나눔의 끈은 놓지 않았다. 그래도 주변에는 기부 활동을 알리지 않았다. 심지어 친지들도 모를 정도였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원칙 때문이었다. 하지만 2002년에 교육대상을 받은 사실이 기사화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그는 "어차피 터진거니까…"라는 마음으로 맘 편히 더 활발한 기부에 나섰다.

어릴 적 학업을 제대로 마치지 못 한 황옥순씨는 어린 학생들을 돕는 데 관심이 많다. 5년 전부터는 인천 계산여고에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장학증서를 든 학생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황씨(앞줄 왼쪽 셋째). [사진 황옥순씨]

어릴 적 학업을 제대로 마치지 못 한 황옥순씨는 어린 학생들을 돕는 데 관심이 많다. 5년 전부터는 인천 계산여고에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장학증서를 든 학생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황씨(앞줄 왼쪽 셋째). [사진 황옥순씨]

  황씨의 관심은 예전에도, 지금도 주로 '학생'이다. 어릴 적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 했던 아쉬움을 '후학'들에게 풀어내는 셈이다. 5년 전 계산여고에 장학금을 전달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대학에는 사업하는 사람들이 장학금 기부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고등학교는 달라요. 그나마 남고는 좋은 대학에 진학한 집에서 기부도 많이 하는데, 여고는 그런 혜택을 전혀 못 받더라구요. 그래서 계산여고를 돕기로 했죠."

  그는 계산여고에서 매년 11명의 학생을 선정해서 장학금을 지원한다. 보람도 크다. "가난한 아이들이 장학금 때문에 일부러 이 학교에 많이 오죠. 이제는 명문고에요. 서울대도 많이 보내고"라며 웃었다.

  가족들은 이러한 황씨를 응원해주는 가장 강력한 '팬'이자 '후원자'다. 황씨는 "손자가 고등학생인데 걔가 그렇게 '할머니처럼 되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요.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해외에 있는 어려운 아이들한테 5만원씩 후원했지"라고 말했다.

  8살 터울의 두 딸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둘째딸은 매년 11명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계산여고의 '황옥순 장학금'을 이어받겠다는 약속도 했다. 황씨는 "어릴 때부터 엄마가 어려운 사람들 도와줘야 하니까 너희들은 뭔가를 바라지 마라고 항상 머리속에 심어놨죠. 그래서 저희 애들은 제가 얼마를 물려준다는 것보다 남을 도와주는 걸 더 좋아해요"라며 웃었다.

  정확히 인생의 절반을 이웃과 함께 한 황씨의 기부 철학은 뭘까. '철학'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손사래를 쳤다.

"돈 몇푼 내놓고 철학이라고 할 게 뭐가 있어요. 그냥 베풀면 내 생명 연장해주고, 날 기쁘게 해주는거지. 저녁에 누우면 내가 기부해준 사람의 환하게 웃는 얼굴이 떠올라요. 밥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표현이 딱 맞지. 내가 이런일을 또 했구나라는 생각에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황옥순씨(왼쪽)가 지난 2월 인천 계양구에 거주하는 저소득층을 위한 성금 500만원을 기부하는 모습. 가운데는 유정복 인천광역시장. [사진 인천사회복지공동모금회]

황옥순씨(왼쪽)가 지난 2월 인천 계양구에 거주하는 저소득층을 위한 성금 500만원을 기부하는 모습. 가운데는 유정복 인천광역시장. [사진 인천사회복지공동모금회]

  그는 여전히 활발한 기부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인천 지역의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함께 쌀과 현금 기부를 하고 있다. 인천 계양구청과 지역 교육청에는 장학금, 시청에는 기부금을 각각 전달하고 있다. "평생 기부한 액수만 따지면 모르긴 몰라도 100억 가까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사람들...

  이러한 노력 속에 지난달 9일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나눔리더' 인천 1호로 가입했다. 이번달 들어선 공동모금회가 선정한 '이달의 기부자'로 꼽히기도 했다. 그가 꼭 하고 싶은 말은 뭘까.

"여기저기 돌아보면 어려운 사람도 많고 힘든 사람도 많아요. 나중엔 그냥 '엄마 잘 살고 갔다' 그런 이야기 듣고 싶어. 그래도 지금까지 70평생 잘 살았다고 생각해요. 다 나눠주면서 사는게 행복한 거지. 더 이상 기부를 하지 못 한다면 그것만큼 두려운 건 없을거 같아요. 마지막까지 남을 도와줄 수 있는 행복함을 느끼고 싶어요."

  정종훈 기자 sake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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