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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 본때 보이려다 … 사우디, 이란에 ‘중동 맹주’ 내주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지난 5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첫 해외 방문지로 사우디아라비아를 찾았을 때 사우디는 들떴다. 트럼프 대통령이 테러 조직을 지원한다는 이유로 사우디 숙적 이란을 고립시켜야 한다며 편들어 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달 만에 상황은 역전됐다. 트럼프의 편들기는 사우디의 자충수로 이어졌고, 이란은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테러조직 지원 말라며 단교 선언 #카타르 콧방귀, 이란 쪽으로 기울어 #미군 철수 뒤 이라크도 이란 영향권 #“이대로 가면 사우디 위상 더 떨어져”

워싱턴포스트(WP)를 비롯한 서방 언론들은 사우디가 야심 차게 주도한 카타르 단교 사태가 “실패하고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지난 18일 사우디·아랍에미리트(UAE)·이집트·바레인은 카타르가 외교 복원 13개 조건을 수용하지 않자 조건을 6가지로 완화한 새 제안을 내놨다. 여기엔 ▶극단주의와 테러리즘 방지 ▶증오·폭력을 유발하는 도발 중단 등이 포함됐다. 위성방송 알자지라 폐쇄 등 당초 조건 상당수가 사라졌다. 단교 조치에도 불구하고 버티기에 들어간 카타르의 사실상 승리다.

단교 이후 카타르는 이란·터키와 가까워졌고 자금력을 바탕으로 생필품을 공수해 꿋꿋이 버티고 있다. 걸프협력위원회(GCC) 회원국인 오만·쿠웨이트는 단교에 동참하지 않았다. 미국은 화해를 촉구할 뿐 사우디를 편들지 않고 있다.

마크 린치 조지워싱턴대 교수는 WP에 “사우디는 봉쇄에 대한 카타르의 공포를 과장했으며 이웃 국가에 해를 가할 수 있다고 능력을 과신했다”고 지적했다.

국제사회 시선도 곱지 않다. 종교·종파·민족이 뒤엉켜 있는 중동에서 온건 개방주의를 표방하며 완충 역할을 해온 카타르에 대한 단교 사태가 지정학적 불안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사우디가 체면을 구기고 있을 때 이란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카타르 사태가 이란에 전략적 기회를 주고 있다”고 전했다. 사우디가 의도했던 아랍의 반이란 동맹 결속은 카타르 탓에 암초에 부딪혔고 이란은 아랍국들의 갈등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란의 세력 확장도 순조롭다. 최근 NYT는 “미국이 (통제권을) 이양한 이라크를 이란이 지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 미국이 철수한 뒤 이라크에 대한 이란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것이다. NYT는 “수퍼마켓의 모든 생필품은 이란산이고 방송엔 이란에 우호적인 내용이 잇따라 나온다”고 전했다.

지난해엔 이라크 의회가 시아파 민병대를 합법화하기까지 했다. 이란의 지원을 받는 세력이 정식 군대가 되면서 이라크 핵심부에 대한 이란의 지배력은 더욱 커졌다. NYT는 “이란의 영향력은 이라크의 군사·정치·경제·문화에 걸쳐 광범위하다”고 분석했다. NYT에 따르면 이라크는 ‘이란 팽창 프로젝트’의 일부다. 이라크를 발판으로 내전의 늪에 빠진 시리아와 예멘, 시아파 무장단체 헤즈볼라가 자리 잡은 레바논으로 확장 중이다.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패망 덕에 속도도 붙을 전망이다. 이라크가 지정학적 요충지인 모술 일대를 탈환했기 때문이다. 알리 악바르 벨라야티 이란 최고지도자 수석보좌관은 “테헤란에서 모술·베이루트를 지나 지중해로 이어지는 저항의 도로가 재개된다”고 노골적으로 야망을 드러냈다.

숙적인 사우디와 이란의 엇갈린 처지는 지역 질서에 변화를 가져올 전망이다. 사우디의 힘은 아랍 국가들의 결속과 그 안에서 사우디가 지닌 위상을 통해 형성됐는데, ‘아랍의 봄’과 이라크·리비아·시리아·예멘 내전이 아랍의 결속을 약화시키고 사우디의 영향력을 축소시켰다는 것이다.

포린폴리시(FP)는 “중동 질서는 아랍-이란-터키의 3자 구도로 이동하고 있다”며 “사우디가 (카타르 단교처럼 갈등을 조장하는) 현재 노선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자신의 위상은 더 축소되고 이란만 강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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