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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 받은 12세 소녀와 2000만원, 법원의 선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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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교육통계연구센터 조사에 따르면 아동학대를 하는 사람의 77%가 부모라고 합니다. 여기 부모에게 학대받은 한 여자아이가 있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경찰 조사를 받다 잠적했고, 의붓아버지는 불구속 기소가 됐습니다. 재판을 받게 된 의붓아버지는 법원에 돈을 공탁했습니다. 형을 적게 받기 위해서였지요. 법원은 이 돈을 은행에 '신탁'하도록 결정했습니다. 부모라고 해도 아이에게 필요한 돈을 마음대로 꺼내쓰지 못하도록 돈을 묶어놓게 한 것입니다. 국내에서는 첫 사례인데요, 그 사연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교육통계연구센터에 따르면 아이들을 학대하는 사람의 77%는 부모라고 합니다. 부모에게 학대받은 아이들은 집을 떠나 '쉼터'로 가야 합니다. 사진은 위 사례와 무관합니다. [사진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

교육통계연구센터에 따르면 아이들을 학대하는 사람의 77%는 부모라고 합니다. 부모에게 학대받은 아이들은 집을 떠나 '쉼터'로 가야 합니다. 사진은 위 사례와 무관합니다. [사진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

사랑이 성추행해 기소된 의붓아빠 #'손해배상금'조로 2000만원 공탁 #학교 안 보냈던 친엄마 못 쓰게 #법원 국내 첫 금융기관 '신탁' 결정 #

"저는 왜 학교 안 가고 동생을 돌봐야 할까요?" 사랑이의 악몽

 '사랑이(가명)'는 올해 12살입니다. 하고 싶은 게 많은 꿈 많은 소녀지요.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이상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엄마는 자꾸 사랑이에게 학교에 가지 말고 어린 두 동생을 돌보라고 했습니다. 하루는 학교에 간 사랑이를 찾아와 일부러 조퇴까지 시켰습니다.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구요.
아빠 김 모(42) 씨는 자꾸 사랑이 몸을 만지려 했습니다. 사실 아빠는 사랑이의 친아빠가 아닙니다. 엄마는 사랑이의 친아빠와 헤어지고 지금의 아빠를 만났습니다.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아빠와 살기 시작해 동생들을 낳았습니다.
사랑이가 자꾸 며칠씩 학교를 빠지자 이웃들이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아동학대가 의심된다고요. 지난해 3월의 일이었습니다.

[중앙 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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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와 2000만원, 그리고 변호사의 고민

경찰은 사랑이 엄마·아빠를 방임과 유기, 신체적인 학대 혐의로 조사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그 사이 엄마는 집을 나가 잠적해버렸습니다. 사랑이는 결국 동생들과 한 지역 아동보호 시설에 가게 됐습니다. 검찰은 사랑이를 성추행하고 학대한 혐의(아동복지법위반)로 아빠를 올초 불구속 기소했습니다.

사랑이 아빠는 감형을 받기위해 손해배상금 성격의 돈 2000만원을 법원에 공탁하겠다고 했습니다. 우리 법은 가해자가 피해자의 피해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일정 금액을 법원에 맡길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사랑이 의붓아빠가 이 제도를 이용한 것입니다.

사랑이를 돕는 대한법률구조공단 전주지부의 임현주 변호사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사랑이 의붓아빠가 맡긴 돈은 사랑이의 친권자가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데, 잠적한 엄마가 바로 사랑이의 친권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동학대는 유기와 방임, 신체적 학대, 정서학대 등 다양한 형태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아동학대를 피해 아이들은 쉼터에서 지내게 됩니다. 사진은 위 사례와 무관합니다.[사진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

아동학대는 유기와 방임, 신체적 학대, 정서학대 등 다양한 형태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아동학대를 피해 아이들은 쉼터에서 지내게 됩니다. 사진은 위 사례와 무관합니다.[사진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

법원, "2000만원 신탁" 결정

2000만원은 사랑이에게는 중요한 돈입니다. 하고 싶은 공부를 맘껏 할 수 있는 거액은 아니지만, 사랑이가 어엿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마중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임 변호사는 엄마가 사랑이 돈을 마음대로 빼가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금융기관에 돈을 묶어놓는 '신탁'입니다. 어른들이 단지 친부모라는 이유로 함부로 아이들 돈에 손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죠.  세월호 사고로 부모를 잃은 아이를 위해 최근 법원이 보상금을 신탁하도록 한 것처럼요.

임 변호사는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서 '법원이 친권자의 의사 표시에 갈음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한 조항을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법원이 엄마의 친권 행사를 정지하고, 엄마 대신 은행에 공탁금을 맡기도록 결정할 수 있도록 말이죠.

김상곤 전주지방법원 판사는 사랑이를 위한 돈을 KEB 하나은행에 맡기도록 했습니다(특정금전신탁계약). 사랑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부모 대신 은행이 돈을 관리하도록 한 것입니다. 배정식 KEB 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센터장은 "피해 아동이 성장하면서 긴급자금이 필요한 때는 법원의 허가를 받아 자금을 집행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배인구 법무법인 로고스 변호사는 "부모로부터 학대받던 아이를 위해 쓰여야 할 돈을 법원이 가해자인 부모로부터 보호해준 첫 사례"라고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김현예 기자 hykim@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그래픽=김영옥 기자

신탁(信託 )은 무엇일까요?

 돈을 은행에 맡기는 행위 자체를 뜻하기도 하는데요. 이번에 사랑이가 한 것은 '후견 신탁'에 해당합니다. 올초 세월호 사고로 부모를 잃은 아이 A양의 이야기 기억하시나요? 우리 민법은 미성년자를 보호하기 위해 후견인(미성년후견인)을 두도록 하는데요, 후견인의 역할은 아이를 보호하고 재산을 관리하는 겁니다. 고모나 이모, 작은 아버지와 같은 친족이 아닌 제3자 1명이 후견인이 되는데, 종종 재산관리 문제로 다툼이 일었습니다. 또 '돈 때문에 아이를 맡는다'는 주위의 색안경도 후견인에겐 상당한 부담입니다.

서울가정법원이 올초 A양을 위해 신탁을 결정한 것도 이런 이유였다고 합니다. 법원은 외부에 소정의 관리비용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금융기관에 돈을 맡기고 아이의 생애주기에 맞춰 자금집행이 이뤄지도록 했습니다. A양이 만 30세가 될 때까지 보상금과 성금을 모두 은행에 맡기는 대신 만 25세가 되면 재산의 절반을 A양에게 주도록 한 것이죠. 만 30세가 되면 나머지 절반을 지급하고요. A양의 후견인이 된 고모는 은행이 매달 지급하는 돈으로 A양을 돌보고요. 가령 계획에 없던 교육비와 여행비가 필요한 경우에는 '자료'를 만들어서 청구해야만 지급받을 수도록 했습니다.

후견신탁은 미국과 일본, 싱가포르와 같은 나라에서는 널리 이용되고 있는데요. 우리 나라에서는 이제 갓 싹을 틔우기 시작했습니다. 현재로서는 KEB 하나은행이 사실상 유일하게 후견신탁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올초 법원은 의사판단 능력이 떨어지는 성인을 위해 재산관리를 후견인이 아닌 금융기관에 맡기는 '성년 후견신탁' 1호 결정을 내린 바 있습니다.

[중앙 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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