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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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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대학원생 시절에,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꼭 헌혈을 했다. 박사 과정을 수료하기까지 대략 60번을 넘게 하는 동안 적십자에서 포상도 받았고, 원주 헌혈의 집 간호사와는 길에서 만나면 인사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주변인들의 생일이면 헌혈하고 받은 영화표나 문화상품권을 선물로 주곤 했다. 그래서인지 나중에는 피를 팔아 영화를 보고 책을 사는 것 아니냐는 오해도 샀다.

그렇게 열심히 피를 팔러, 아니 나누러 다닌 이유는 어느 날 헌혈을 했을 때의 뿌듯함을 잊을 수 없어서다. 논문을 읽고 쓰면서 “지금 하는 공부가 사회에 어떤 보탬이 될 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종종 물었지만 매번 제대로 답을 낼 수가 없었다. 연구가 즐겁다, 행복하다, 하는 자존감과 위안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런데 내 몸에서 나온 붉은 피를 보는 순간 ‘누군가는 이 피를 수혈받겠구나, 아니면 약을 만드는 데 쓰이기라도 하겠구나’ 하는 데 생각이 닿았다. 그때 “나는 지금 여기에 사회인으로 살아 있다”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 감정이 일었다. 그날부터 꾸준히 헌혈을 시작했다.

박사 과정 시절에는 갑자기 해외 아동과 결연해 매달 얼마씩을 후원하기도 했다. 처음 서류를 작성할 때 “왜 후원하십니까?” 하는 항목에 답해야 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한참을 고민하다 “나를 위해서”라고 적었다. 그러고선 괜히 부끄러워져 다른 사람들의 답을 찾아보니 거의 대부분이 나와 같았다. 결국 헌혈이든 후원이든, 저마다 타인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려 했던 셈이다. 2년 가까이 후원을 이어가다 학자금 대출 이자 독촉이 계속되던 어느 날 후원을 중단하고 많이 속상했지만, 덕분에 대학원생 시절을 조금은 더 버텨낼 수 있었다. 헌혈의 집 간호사의 권유로 조혈모세포 기증 서약까지 하고는 한동안 연락이 올까봐 두근두근, 하던 그때의 내가 가끔 애틋하게 떠오른다.

지난주에 66번째 헌혈을 했다. 대학원에서 나오고는 근 3년 만이었다. 그때와는 다른 감정이 들까 어떨까 궁금했는데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헌혈의 집을 찾기로 했다. 여전히 혈관을 흐르는 피보다 진실하게, 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글을 내놓을 자신이 없다.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나는 다시 타인에게 기대기로 한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