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추리소설 작가 된 고교생 8명 뒤에 이런 선생님 계셨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인천공항고 윤자영 과학 교사가 수업을 하고 있다. 그는 이 학교 학생 8명에게 과학소설 쓰기를 독려했다. 그 결과로 학생 8명과 그의 작품이 실린 단편 추리소설집 『해피엔드는 없다』가 지난 5월 출간됐다. [사진 윤자영 교사 제공]

인천공항고 윤자영 과학 교사가 수업을 하고 있다. 그는 이 학교 학생 8명에게 과학소설 쓰기를 독려했다. 그 결과로 학생 8명과 그의 작품이 실린 단편추리소설집 『해피엔드는 없다』가 지난 5월 출간됐다. [사진 윤자영 교사 제공]

“누군가 교장선생님에게 악의를 품고 과망가니즈산 칼륨을 물에 타서 포도 주스라고 건넨 게 아닐까? 그렇다면 교장 선생님은 자살한 게 아니라 살해당한 거야!”

인천공항고 학생 8명, 소설집『해피엔드…』발간 #추리소설 쓰는 윤자영 과학교사 제안 받고 도전 #수업 중 배운 과학원리 담아 석달 만에 탈고 #매일 1시간 일찍 등교해 한 편씩 집필 #학생 “얼떨떨하고 뿌듯” “과학에 재미 느껴” #윤 교사 “성취감·자신감 심어준 게 큰 보람

지난 5월 출간된 단편소설집 『해피엔드는 없다』에 수록된 소설인 ‘죽음의 포도주스’의 한 대목이다. 소설은 비 오는 날 자기 사무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어느 학교 교장의 미스터리를 학생 다섯이 과학 지식을 활용해 해결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처럼『해피엔드는 없다』에 담긴 소설 9편은 교통사고, 연쇄살인 사건 등의 의혹을 과학으로 풀어나가는 추리물이다.

인천공항고 동아리 '사이언픽션' 학생 8명과 이 학교 윤자영 과학교사가 함껜 낸 추리소설집 『해피엔드는 없다』의 표지.

인천공항고 동아리 '사이언픽션' 학생 8명과 이 학교 윤자영 과학교사가 함껜 낸 추리소설집 『해피엔드는 없다』의 표지.

소설집에 담긴 9편의 저자는 인천공항고 3학년 학생 8명과 이 과학교사 윤자영(39)씨다. 학생들의 공통점은 이 학교 자율동아리 ‘사이언픽션’ 회원이란 점이다.
사이언픽션은 "수업에서 배운 과학지식을 활용해 소설을 써보자"는 윤 교사의 제안으로 지난해 8월 생겨났다. 당시 2학년이던 학생들은 동아리가 결성되자 매일 아침 1시간씩 일찍 등교했다. 이후 지난해 연말 원고지 80매 분량의 단편 8편이 나왔다. 마침 학생들의 동아리 활동을 지원하는 교육부 사업이 윤 교사의 눈에 띄었다. 여기에 응모해 이번 소설집 출간 비용을 해결했다. 윤 교사의 글을 더해 총 9편이 이번에 한 권의 책으로 나왔다. 그는 지난 2015년 추리소설 작가로 등단했다.

과학소설 집필을 제안한 배경에 대해 윤 교사는 “수업 시간에 새로운 과학 이론을 접한 학생들로부터 ‘이런 것은 왜 배우느냐’ ‘배워서 어디에 쓰냐’는 질문을 종종 받아서"라고 했다. "과학 이론이 실생활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알려주고 과학에 대한 흥미도 북돋워 주고 싶어서였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과학교육을 전공한 윤 교사는 수업 때도 추리소설을 연상케 하는 퀴즈를 학생들에게 던져 흥미를 유발한다.
가령 “어느 여름, 체육시간이 끝나고 목마른 학생들이 생수통 앞으로 몰려갔어. 대부분은 '물맛이 쓰네' 하며 이내 물을 뱉고 마시지 않았지. 그런데 몇몇은 '괜찮은데' 하며 벌컥벌컥 마셨어. 그런데 말야. 물을 마신 아이들이 차례로 죽어간 거야. 도대체 그 여름에 그 학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하는 식이다.

윤 교사가 이런 질문을 던지면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잇따라 손을 든다. 자기만의 추리를 내놓거나, 추리의 실마리가 될 추가 단서를 윤 교사에게 요구한다. 한동안 기다렸다가 윤 교사는 이렇게 답변을 풀어낸다.
“누군가 생수통에 독을 탄 거야. 독이 투명하니까 눈에는 안 보였겠지. 하지만 쓴 맛이 나서 대다수 학생들은 물맛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어. 그런데 소수는 쓴 맛을 느끼지 못했어. 이들처럼 특정한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미맹(味盲)이라고 해. 미맹은 열성유전에 속해서 잘 유전되지는 않아. 이런 미맹을 식별하는 시약이 있어. PTC 용액인데, 독성 때문에 많이 먹으면 죽게 돼. 이날 누군가 다량의 PTC 용액을 생수병에 넣었던 게야."

3학년 김지윤양의 습작노트. 과망가니즈산칼륨이라는 보라색 가루를 물에 섞으면 보라색 용액이 되고 여기에 아황산수소나트륨을 섞으면 물처럼 투명해진다는 과학 원리를 이용해 추리소설을 엮었다. [사진 윤자영 교사 제공]

3학년 김지윤양의 습작노트. 과망가니즈산칼륨이라는 보라색 가루를 물에 섞으면 보라색 용액이 되고 여기에 아황산수소나트륨을 섞으면 물처럼 투명해진다는 과학 원리를 이용해 추리소설을 엮었다. [사진 윤자영 교사 제공]

윤 교사의 이런 방식에 재미를 느낀 학생 중 몇몇은 수업에서 배운 과학 원리를 활용해 직접 퀴즈를 내 윤 교사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윤 교사는 여기에서 학생들이 직접 쓰는 과학추리소설 아이디어를 떠올려다. “학생들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이야기로 엮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윤 교사는 2005년 교단에 섰다. 추리소설을 즐겼으나 글쓰기에 관심이 많진 않았다. 그러다 2014년쯤 ‘나도 한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 우연히 글쓰기를 시작했다. 이번까지 『십자도 시나리오』 『피 그리고 복수』 등 장편 1편과 단편 4편을 냈다.

윤 교사의 뒤를 이어 이번에 '추리소설 작가'를 체험한 학생들에게 소감을 물으니 “공중에 붕 뜬 것처럼 기분이 묘하고 벅차다”고 했다. '죽음의 포도주스’를 쓴 3학년 김지윤양은 “내 글이 책이 되어 서점에 놓인다고 생각하니 신기하기도 하고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뿌듯하다”고 말했다. 김양은 이 경험 덕분에 교과서를 대하는 시선도 바뀌었다고 한다. “‘어렵고 재미없다’고 여기던 교과서 내용도 소설의 소재나 정보로 보여 흥미로워졌다. 대학에 가서도 글쓰는 작업에 계속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다.

3학년 남용준군도 비슷한 말을 했다. 남군은 이번 책에서 '이유같지 않은 이유'라는 제목의 단편을 썼다. 1족 알칼리 금속이 물에 닿으면 쉽게 산화하는 특성을 활용해 범행을 저지른 연쇄살인범에 대한 내용이다. 남군은 “창작을 한다는 게 재미있는 일이란 걸 새삼 깨달았다. 아침에 모여 글을 쓰는 짧은 시간 동안 공부로 쌓인 스트레스가 다 사라지는 기분이었다”고 전했다.

인천공항고 '사이언픽션' 동아리 학생들은 매일 아침 1시간 일찍 등교해 함께 모여 소설을 썼고 3개월 만에 단편을 하나씩 완성했다. 사진 윤자영 교사 제공]

인천공항고 '사이언픽션' 동아리 학생들은 매일 아침 1시간 일찍 등교해 함께 모여 소설을 썼고 3개월 만에 단편을 하나씩 완성했다. 사진 윤자영 교사 제공]

이런 학생들을 윤 교사는 대견스러워 했다. 그는 “이번에 소설을 쓴 학생들은 모두 이과생이라 글쓰기에 친숙하진 않다. 매일 모여 글을 쓰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들이 목표를 이뤄내는 모습을 지켜보게 돼 교사로서 뿌듯했다. 이번 경험이 아이들 인생에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이어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