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냄새나는 영화 간판을 관객과 나누고 싶다” -극장 ‘손 간판’ 명맥 이어가는 박태규 작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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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극장에 내걸린 영화 손 간판을 그린 박태규 작가. 프리랜서 오종찬

광주극장에 내걸린 영화 손 간판을 그린 박태규 작가. 프리랜서 오종찬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의 광주극장은 82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1935년 문을 연 이곳의 낡고 오래된 건물과 허름한 내부는 시간이 멈춘 듯한 인상을 준다. 시민은 물론 타지에서 광주를 찾은 관광객까지 일부러 이곳을 방문하곤 한다. 대형 복합상영관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예술영화를 위주로 하루 평균 5편의 영화를 상영한다. 추억과 낭만을 선물하는 곳이다.

미대 졸업 후 1992년 광주극장서 처음 일 시작 #실사 간판에 밀리며 손 간판 점차 설 자리 잃어 #직업으로 손간판 제작은 중단했지만 지금도 1년에 1~2편 그려 #“작가의 개성 담긴 손 간판은 사람 냄새나는 작품” #

광주극장을 찾는 관객을 가장 설레게 하는 요소는 따로 있다. 극장 건물 정면 외벽에 내걸린 큼지막한 영화 손 간판이다. 오랜 듯한 주인공의 모습과 일정하지 않은 형태의 글자가 적힌 손 간판은 뭔지 모를 ‘촌티’가 나지만 보는 이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광주극장을 찾은 이들은 손 간판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기도 한다. “요즘도 영화 간판을 사람이 직접 그리나?”라며 의아해하는 관객들도 있다.

광주극장에 내걸린 영화 손 간판을 그린 박태규 작가. 프리랜서 오종찬

광주극장에 내걸린 영화 손 간판을 그린 박태규 작가. 프리랜서 오종찬

광주극장의 명물인 영화 손 간판을 그린 사람은 박태규(52) 작가다. 전남 함평 출신으로 호남대 미대를 나온 박 작가는 92년 졸업과 함께 광주극장 미술팀에 취직해 손 간판 그리는 법을 배웠다. 작은 캔버스가 아닌 ‘큰 그림’에 관심이 많아서 시작한 일이었다. 박 작가는 “많은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고, 누구나 볼 수 있는 극장 손 간판에 매력을 느꼈다”고 말했다.

취업 후 곧장 손 간판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 미술팀을 이끌던 스승인 고(故) 홍용만 부장의 밑에서 1년여간 허드렛일을 했다. 박 작가는 “홍 부장님과 저를 포함해 5명이 미술팀에 근무했는데, 선배들이 손 간판을 그릴 때 쓰는 붓을 물에 빨고 무거운 간판을 옮기고 극장 외벽에 설치하는 일부터 했다”고 소개했다. 이후 노력을 인정받아 선배들과의 공동작업으로 1년에 70~80개 안팎의 손 간판을 그렸다. 광주 지역 다른 극장 측의 요청을 받고 찾아가 그려주기도 했다.

광주극장에 내걸린 영화 손 간판을 그린 박태규 작가. 프리랜서 오종찬

광주극장에 내걸린 영화 손 간판을 그린 박태규 작가. 프리랜서 오종찬

그러나 2005년까지였다. 90년대 후반부터 대형 복합상영관이 점차 생겨나더니 단관 극장인 광주극장은 점점 관객의 발걸음이 줄었다. 에나멜페인트와 붓으로 직접 그린 손 간판 대신 출력한 실사 간판이 극장 앞에 내걸리기 시작했다. 개성은 없지만 비용은 적게 들고 품질은 좋은 제작 방식이었다. 박 작가는 “작가의 개성이 담긴 손 간판이 점차 사라지는 게 아쉽지만 실사 간판에 밀리는 건 시대적 흐름이었다”고 했다.

박 작가는 결국 ‘직업’으로 영화 손 간판을 그리는 일을 2005년 중단했다. 하지만 극장을 떠난 지금도 여전히 1년에 1~2개의 영화 손 간판을 그려 광주극장에 내걸고 있다. 광주극장은 박 작가가 그린 손 간판을 해당 영화가 상영되지 않는 때에도 걸어 놓는다. 영화 상영을 알리는 기능보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르는 손 간판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서다.

 박 작가는  5ㆍ18 민주화운동이나 세월호 참사 등 사회 문제를 주제로 한 가상의 영화 손 간판을 그리기도 한다. 광주의 5월 정신을 다룬 ‘광주탈출’ , 노근리 양민학살을 소재로 한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 등이다.

광주극장에 내걸린 영화 손 간판을 그린 박태규 작가. 프리랜서 오종찬

광주극장에 내걸린 영화 손 간판을 그린 박태규 작가. 프리랜서 오종찬

‘마지막 영화 간판장이’로 불리는 박 작가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문화 프로그램 ‘영화 간판학교’를 여는 것도 준비하고 있다. 광주극장 미술실에서 10명 안팎의 시민들에게 손 간판 그리는 법을 직접 알려주고 함께 작품 활동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환경 문제에도 관심이 많은 그는 광주환경운동연합의 공동대표도 맡고 있다. 박 작가는 “실사 간판에 밀린 손 간판은 결국 영화관에서 사라지겠지만 누가 그리냐에 따라 개성이 담겨 사람 냄새가 나는 손 간판을 그리고 감상하는 즐거움을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광주광역시=김호 기자 kim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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