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The New York Times

푸틴은 트럼프에게 원하는 걸 얻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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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스티븐 코트킨프린스턴대 교수

스티븐 코트킨프린스턴대 교수

제임스 코미 전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은 의회 청문회에서 “러시아가 2016년 미 대선 개입을 시도한 데 대해 어떤 의심도 없다”고 밝혔다. 그는 “러시아가 의도적으로 교묘하게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미 대선에 개입했다”며 “그들은 반드시 돌아와 미국을 공격할 것이다”고 잘라 말했다.

트럼프, 러시아 내통설로 곤욕 #곁가지 에피소드 불과한 수준 #러시아 미국 침공이 진짜 문제 #트럼프 이후 양국 교류 살려야

이 말을 들은 크렘린궁은 보드카로 축배를 들 것 같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미국을 공격하며 쾌감을 느낀다는 건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푸틴에겐 더 중요한 목표가 있다. 서방의 대러 제재 중단이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한 이래 미국과 유럽은 러시아 정·재계 인사들이 서방의 자금과 기술을 얻지 못하게 막아왔다. 특히 지난해 푸틴의 미국 대선 개입 의혹으로 서방의 제재는 더욱 강해졌다. 이로 인해 푸틴은 큰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이미 푸틴은 국제 무대에서 연패의 늪에 빠져 있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이래 서방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고 러시아에 각을 세우고 있다. 푸틴이 시리아의 도살자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을 지원한 것도 러시아에 큰 손해를 입혔다. 반미 국가 베네수엘라에 투자한 것도 실패로 돌아갔다. 푸틴은 2015년 러시아의 무기수출액 가운데 25%를 베네수엘라에 쏟았지만 이 불량국가가 파산하면서 국가 예산용 세수를 10억 달러 줄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미 상원은 푸틴의 대선 개입을 이유로 대러 제재 수위를 높이기로 결정했다. 푸틴에겐 엎친 데 덮친 격이다. 대러 제재는 2014년 개시됐고 2년 뒤 강화된 바 있다. 두 번 다 행정명령 형태로 집행됐다. 그러나 이번엔 법으로 제정된다. 제재의 강도가 훨씬 커지는 것이다.

물론 러시아는 미국에 사이버 공격을 감행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미 의회의 제재 입법에 이어 의회 정보위원회와 특검은 트럼프 선거본부가 러시아 정보 당국과 손잡고 클린턴 선거본부를 해킹한 의혹을 파헤치고 있다. 미국인들은 그 흑막을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해킹을 위해 트럼프 선거본부에 도움을 청했다는 주장은 우습기 짝이 없다. 농구 스타 마이클 조던이 내게 골 넣는 법을 물어보는 것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손대는 것마다 실패한 트럼프의 참모인 마이클 플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아는 사람이라면 러시아가 그의 도움을 원했다는 주장에 실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트럼프의 부하 중 일부가 돈을 노려 모스크바에 아부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러시아 정보요원들에게 노출됐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트럼프와 푸틴의 공모설은 결국 지엽적인 얘기다. 진짜 문제는 러시아가 미국의 정책을 좌지우지하기 위해 트럼프 캠프에 침투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정보요원 출신인 푸틴은 비밀 침투 능력이 대단하다. 트럼프는 오래전부터 러시아의 독점재벌 올리가르히와 교류해왔다. 러시아 정보요원들에 따르면 트럼프는 ‘걸어다니는 도청기’였다. 이 주장의 사실 여부가 밝혀지면 트럼프와 푸틴의 공모 대신 ‘러시아의 미국 침공’이 논란의 핵심이 될 것이다.

트럼프가 지금 겪고 있는 곤경은 대선후보 시절 너무나 어이없는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미 대선에 개입한 사실이 논란이 된 직후 대러 제재를 중단하려 시도한 것이 그것이다. 그가 러시아에 협박당하는 처지가 되면서 부담을 느낀 결과란 소문이 무성했다. 그러나 트럼프가 푸틴 같은 독재자에게 진심으로 애정을 느낀다는 점을 생각하면 협박당해 그런 짓을 한 것은 아닌 듯하다. 트럼프가 외국 정부 고관들에게 자신과 러시아의 공모 혐의를 부인해 달라고 간청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코미가 청문회에서 효과적으로 증언한 덕분에 트럼프가 사법집행 방해 혐의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하차할 공산이 커졌다.

‘트럼프의 푸틴 사랑’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미국에 꼭 필요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다. 결국 미국은 국익을 위해 러시아를 필요로 한다는 걸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추진한 러시아 고립 작전은 실패로 끝났고 러시아는 지난해 미 대선에 성공적으로 개입했다. 미국이 러시아를 절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을 극적으로 깨우쳐준 것이다. 푸틴의 목표는 정권 생존이다. 엄청난 판돈을 걸고 목숨이 걸린 도박을 하는 셈이다. 이런 마당에 모스크바가 붕괴될 때까지 압박하는 정책은 어리석다. 러시아를 다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교류뿐이다. 그러나 대러 교류는 미국이 우위에 있는 상황에서 이뤄져야 한다. 트럼프 시대엔 안 된다.

트럼프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그는 집권 뒤 예상외로 뛰어난 인물들을 요직에 앉혔다. 그러나 이들은 성격 파탄자나 다름없는 주군 때문에 파국으로 치닫는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 같다. 독재자 푸틴과 달리 트럼프의 운명은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미국인 대다수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질기고 생명력이 강하지 않은가.

스티븐 코트킨 프린스턴대 교수

◆원문은 중앙일보 전재계약 뉴욕타임스 신디케이트 9일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