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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나 있을 법한 화재가 2017년 런던에서.." 복합패널 외장재가 '굴뚝' 역할, 안전불감증이 낳은 人災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영국 런던 24층짜리 임대아파트 그렌펠 타워를 모두 태운 대형 화재는 21세기에 벌어진 19세기형 참사다.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당국과 관리회사의 ‘안전불감증’을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런던 경찰과 소방당국에 따르면 화재로 인한 사망자는 15일(현지시간) 오전 현재 최소 12명으로 늘었다. 70여 명이 병원에서 치료중이지만 20명 가량은 중태다.

1999년부터 영국 내 복합패널 위험성 제기됐지만 정부 대책 안세워 #외벽과 패널 사이 틈 타고 순식간에 건물 전체로 번져 #리모델링 했다지만 화재 경보 작동 안하고 스프링클러도 설치 안돼 #불 나면 '집에 머물러 있는 게 안전' 잘못된 화재 대피 안내문도 도마 #"서민 임대아파트라 방치""역대 최대 스캔들" 사망자 최소 12명으로 늘어

스튜어티 쿤디 런던경찰청 국장은 “건물 꼭대기 층까지 소방 요원이 진입했는데 안타깝게도 추가 생존자는 없을 것 같다”며 “복잡한 수습 과정에서 사망자가 늘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텔레그래프는 최대 500명 가량이 현재 소재가 파악되지 않고 있으며, 사망자가 100명 정도 늘어날 수 있다고 보도했다.

14일 화재가 발생한 영국 런던 그렌펠 타워에 갇힌 한 주민이 구조를 요청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14일 화재가 발생한 영국 런던 그렌펠 타워에 갇힌 한 주민이 구조를 요청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번 화재의 정확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당국은 일단 4층에서 발생한 냉장고 폭발이 발화의 시작이었는지 조사중이다.

하지만 저층에서 시작된 불이 급속도로 건물 전체로 퍼진 것은 화재 위험을 고려하지 않은 건물 리모델링이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1974년 건축된 그린펠 타워는 최근 2년간 수리를 했는데, 이때 가연성 물질이 포함된 패널을 외장재로 사용한 것이 치명적이었다는 분석이다.

화재 발생 초기에 저층에 거주하다 건물을 빠져나온 주민들은 처음엔 불이 지상에 심어진 나무 높이에서만 타오르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이 불길이 단열재가 포함된 패널이 설치된 외벽으로 옮겨붙자 순식간에 고층까지 번져갔다고 말했다.

그렌펠 타워의 리모델링은 현재 부도로 폐업한 업체가 시공을 맡았다. 해당 업체 관계자는 “일반적으로 리모델링할 때 쓰는 알루미늄 합성물질(ACM) 패널을 시공했다”고 텔레그래프에 말했다. 건물 외벽에 단열재와 패널을 차례대로 붙이는 방식인데, 노후한 건물을 저렴하게 수리하는 데 쓰인다.

14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서부 켄싱턴의 24층 임대아파트에서 큰 불이 났다. 오전 1시쯤 저층부에서 폭발음과 함께 시작된 화재는 50여 분 만에 상층부까지 번지며 건물 전체를 전소시켰다. 외장재로 사용된 복합패널이 불길을 윗쪽으로 확산시킨 '굴뚝' 역할을 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AFP=연합뉴스]

14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서부 켄싱턴의 24층 임대아파트에서 큰 불이 났다. 오전 1시쯤 저층부에서 폭발음과 함께 시작된 화재는 50여 분 만에 상층부까지 번지며 건물 전체를 전소시켰다. 외장재로 사용된 복합패널이 불길을 윗쪽으로 확산시킨 '굴뚝' 역할을 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AFP=연합뉴스]

전문가들은 이 외장재가 ‘굴뚝‘ 역할을 해 불이 나면 건물 외벽과 이 패널 사이의 공간을 타고 삽시간에 건물 위쪽으로 번져간다고 지적했다. 영국에서는 이미 1999년부터 이같은 외장재가 화재에 취약하다는 점이 지적됐다. 그러나 현재 3만여 동의 건물에 설치돼 있을 정도로 화재위험에 둔감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화재 안전 전문가인 그래엄 필드하우스는 “불이 콘크리트를 타고 확산되지 않는다. 복합패널이 불이 번진 원인이었다“고 지적했다.

짐 그록클링 화재예방연합 국장도 “2014년부터 가연성 물질을 사용한 건물 외장재의 안전을 점검해야 한다고 정부에 요구해왔다”고 밝혀 정부의 안전불감증이 도마에 올랐다. 영국 정부는 이번 참사가 발생한 뒤에야 부랴부랴 비슷한 리모델링을 거친 고층 건물에 대한 안전 점검에 나섰다.

인재(人災)가 초래한 참사임을 보여주는 다른 증거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해당 아파트는 리모델링을 완료했음에도 화재 당시 경보가 울리지 않았다. 특히 건축 연도가 오래돼 규제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이유로 스프링클러가 설치돼있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14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의 임대 아파트 ‘그렌펠 타워’ 화재 현장에서 한 소방관이 피해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까맣게 타버린 건물 외벽이 화재 당시 참혹했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AP=연합뉴스]

14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의 임대 아파트 ‘그렌펠 타워’ 화재 현장에서 한 소방관이 피해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까맣게 타버린 건물 외벽이 화재 당시 참혹했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AP=연합뉴스]

해당 임대아파트를 관리하는 켄싱턴첼시임대관리회사(KCTMO)의 고위 간부였던 렉 커벨은 “이번 화재는 영국의 가장 큰 스캔들“이라며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고 비판했다.

아파트 입주위원회는 2013년 배선 문제로 화재가 발생했을 때 안전 조사를 하려 했으나 관리회사 측은 덮으려 했고, 소유주도 이를 거부했다고 주민들은 폭로했다.

2009년 런던 남부에서 발생한 라커날하우스의 화재 모습. 이번 화재와 판박이란 지적이 나오고 있다. [미러지 캡처]

2009년 런던 남부에서 발생한 라커날하우스의 화재 모습. 이번 화재와 판박이란 지적이 나오고 있다. [미러지 캡처]

그렌펠 타워가 이민자들과 연금생활자 등 저소득층이 주로 사는 공공 임대주택이라 무시를 당했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으면서 런던 시민들 사이에선 분노가 일고 있다.
화재 현장에서 건물 외장재가 화재로 떨어져내리는 것을 지켜보던 주민들 사이에선 “당국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신경 쓰지 않는다”“독일이나 스칸디나비아 국가 같은 곳에선 저런 싸구려 소재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워싱턴포스트는 “19세기나 20세기, 지구촌의 상대적으로 덜 부유한 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 통제 불능의 화재가 발생했다. 최근엔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없다“고 꼬집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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